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가고 한 번 쏟아낸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글은 여러 번 고칠 기회가 있지만 말은 그렇지 않으므로 실수도 많다. 청마의 해 첫 머리말의 무거움을 느낀 일이 있었다.
얼마 전 현오석 부총리가 카드사 개인 정보 유출에 따른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의 경질 여부를 묻자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 따지고 걱정만 하는데 현명한 사람은 그걸 계기로 해서 대책을 마련한다"며 "(개인 정보 이용에) 동의를 해놓고 정보가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도 신중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파문이 커지자, 현 부총리는 "정보 제공 동의와 관련된 관행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이 역시 정보 유출이 금융 소비자 잘못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또 한 번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나의 경우도 방송이 끝나고 모니터를 하다 보면, '아~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라며 매일 후회를 하게 된다.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며 내 의도와 다르게 느끼고 되묻는 경우, 말을 잘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얼마 전, 강의 부탁을 받고 미리 녹음을 해서 들어본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한마디면 족할 말을 참 중언부언하고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타인의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며 쉽게 비판했는데 정작 나는 그런 실수를 매일 범한 것이었다. 말의 해를 시작하면서 정말 말을 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떤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일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유재석을 들 수 있다. 유재석은 맞장구를 가장 잘 쳐 주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 방송을 진행하면 두 가지를 얻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캐릭터. 그 사람의 개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박명수의 2인자 콘셉트, 버럭 화를 내는 호통 콘셉트도 그와 함께할 때 빛이 난다. 그건 유재석이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기 때문에 상대방의 개성을 잘 찾아내는 것이다. MC가 여럿인 상황에서 서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가장 적절하게 대꾸해 주므로 그 사람의 개성도 살고 유재석도 빛이 난다.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리액션은 웃음이다. 심지어는 면전에서 자기 욕을 해도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그래서 다들 함께하고 싶은 MC로 유재석을 꼽는다. 다른 사람의 안경을 벗게 하려고 본인이 먼저 안경을 벗고 망가지는 사람. 그래서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재미있다. 명창이 되려면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다 보면 무슨 말이 필요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유재석과 함께 방송하면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장점은 겸손이다. 거만한 연예인들도 유재석과 방송을 하면 그의 태도를 보고 겸손해진다는 소문이 있다. 국민 MC도 저렇게 겸손한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말은 실수로 나오는 법이 없다. 마음에 들어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입으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유재석의 명랑한 기운은 바로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은 마음 밭이 명랑한 사람인 것이다. 쾌도난마로 유명한 박종진 앵커는 날마다 '오늘도 방송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열 번씩 소리 내어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 기분이 즐거워진다고. 20여 년이나 방송을 진행한 베테랑 앵커인 그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들으려고 애쓴다. 그와 대화가 술술 풀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칭찬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도 좋다. 방송에 들어가기 전, 출연자에게 '와, 오늘 멋있으시네요'라며 인사를 건네고 시작한 방송은 분위기가 당연히 좋다. 흰 쌀로 밥을 지어 플라스틱 용기에 넣어 두고 '사랑해' '너 미워' 이 두 가지 글을 쓴 종이를 넣고 뚜껑을 닫아 두면, '사랑해'를 쓴 종이를 넣은 밥에선 흰색과 노란색 곰팡이가 피고, '너 미워'를 쓴 종이를 넣은 밥에선 검은 곰팡이가 피고 악취가 아주 심하게 난다고 한다. 생명이 없는 밥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우리에게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푸른 청마의 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걸 늘 기억하고, 잘 듣고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건 어떨까?
이언경/채널A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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