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라면 단연 '프라하'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라하가 아닌, 하루 이상은 느긋하게 머물면 좋겠다 싶은 곳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중세에서 시계가 멈춘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기차를 탄다면 남쪽으로 두 시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나 린츠에서도 셔틀버스를 타고 갈 만큼 멀지 않은 거리다. 가는 길은 경치가 좋아 두세 시간쯤은 훌쩍 지나간다. 보헤미안의 삶이 묻어나는 그림 같은 마을과 호수를 지나 중세마을로 향하는 길엔 낭만이 가득하다. 주황색 지붕과 구부러진 돌길이 있는 이 중세마을은 그림 형제의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역사지구를 이루는 300여 채의 가옥과 성은 1992년 체코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유서 깊고 아름답다.
황제의 화려한 삶을 엿볼 수 있는 프라하와 비교해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귀족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던 영주 로젠베르크 통치 때의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코, 오스트리아, 바이에른과 북이탈리아 사이의 교차점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붓놀림이 더해진 성을 비롯해 각기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에그겐베르그 가문이 다스릴 무렵인 17세기 말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극장이 세워지고 성 정원도 개장됐다. 바로크 양식이 들어온 것은 슈바르첸베르그가의 지배하에 있을 때이다. 19세기 이후엔 큰 변화를 겪지 않으며 요새와 감시탑 등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고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 반할지도 모르겠다. '르네상스의 진주'로 알려진 이 성은 중앙 유럽에서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자 이 도시의 상징이다. 체코에서는 프라하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1253년 크룸로프 영주가 지었으며, 세계 300대 건축물에 포함될 정도로 유명한 성이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화려한 장식의 흐라데크 탑, 고딕 양식의 첨탑이 있는 성 비투스 교회와 함께 강 옆의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아 위엄을 뽐낸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도시를 감싸는 것 같기도 하다. 성 주위 해자에 서식하는 곰 두 마리가 기묘한 성 장식과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더욱 흥미롭다.
성은 시대별로 유행한 각기 다른 양식의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색색의 장식 패턴이다. 1960년대엔 히피들에게 함락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분홍과 녹색 패턴으로 섬세하게 장식돼 있다. 어떤 시기에는 장식 예산이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멀리서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외벽은 실제 동상 대신 동상과 벽돌을 그려 넣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160여 개의 계단을 지나 성벽으로 올라가면 시가지 윤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블타바 강이 성을 조각하고 건너편 마을도 함께 빚어낸 듯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그림 같다.
성을 둘러본 후 마을로 향하면 골동품 상점과 잘 보존된 고딕, 르네상스 건물이 늘어선 거리가 나타난다. 성 주변을 굽이쳐 흐르는 블타바 강처럼, 조약돌 길이 집과 집 사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아 도는 것이 보인다. 아늑한 숙소, 카페, 세월의 흔적이 서린 중세 선술집은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에게 머무르라며 손짓한다. 마을에선 골목을 거닐며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유리 수공예품, 나무 간판, 오래된 서점. 최소 수십 년에서 백 년이 훌쩍 넘은 것까지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고 희귀한 것이 많아 눈요기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덧 시청사가 자리 잡은 스보르노스티 중앙 광장에 도달한다. 13세기에 형성된 이 광장은 영화 '아마데우스'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라트란 거리와 구시가를 연결하는 '이발사의 다리'도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체코의 수호 성자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이 있는 라제브니키교가 그것인데, 이 다리엔 살인사건으로 끝나버린 루돌프 2세의 서자와 이발사 딸의 사랑이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평범해 보이지만, 역시 이야기가 더해지니 오래 머물고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구시가 안쪽에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 미술관이 있다. 그의 미술관이 있는 이유는 이곳이 어머니의 고향이기 때문. 오스트리아보다 실레의 작품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유일한 조각작품과 직접 디자인한 가구, 데스마스크도 전시한다. 이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을 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장소다.
체스키 크룸로프 여행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해가 진 후 찾아온다. 저녁 무렵, 굴뚝에서 흘러나온 하얀 소나무 연기가 강 위로 둥실 떠가는 모습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둠이 깔리고 블타바 강과 성의 실루엣이 드러나면 마법 세계 어디쯤 와 있는 듯 묘한 기분도 든다.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은 밤, 길모퉁이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온 클래식 음악은 어둠 드리워진 중세 건축물과 뒤엉켜 밤 풍경으로 한없이 빠져들게 한다. 체코의 풍부한 역사와 다양한 면모를 경험하고 싶다면 야간 여행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한편, 여행자에게 낭만적인 이 골목도 주민들에겐 그저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건물 1층에는 보통 관광객 대상의 상점이, 그 위로는 가정집이 자리 잡고 있다. 도시 인구가 1만5천여 명인 것에 비해 체스키 크룸로프를 찾는 관광객 수는 그 열 배 정도. 옛것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해 그 역사적 자산을 밑천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셈이다. 변화와 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시대에도 변치 않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인지를 이 도시는 말해주고 있다.
글'사진 정영희 전 '대구문화' 통신원 android201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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