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금루(禁漏)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제복의 형식은 일치(一致)다. 다른 것과의 구별, 차별성은 제복이 지닌 속성이다. 비록 한 꺼풀의 옷에 불과하지만 남달라야 한다는 자부심은 이 세상 모든 제복을 관통하는 가치이자 정신이다. 그래서 제복은 권리보다 의무에, 감정보다 이성에 더 가깝다. 제복은 '나'가 아니라 '너',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더 중시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전체가 해를 입는다면 제복은 더 이상 중요한 기호(記號)가 아니라 단순히 몸을 가리는 수단에 불과하다. 제복의 으뜸 덕목을 '명예'라고 단정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거친 맹골수도(孟骨水道)에 수많은 어린 생명이 4월 봄꽃처럼 떨어진 지도 벌써 아흐레째다. 온 국민이 가슴 졸이고, 한결같은 염원에도 희망은 멀어지고 있다. 탄식과 기도가 아무리 뒤섞여도 눈물샘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제복은 건재하다. 희망의 싹을 일찌감치 자른 결과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마뱀 꼬리 떼듯 도망쳤다. 아이들은 제복의 한마디에 살아야 한다는 절대 명제마저 억눌렀다. 진정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제복이 지향하는 가치와 정신이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찬 바닷물 밑에 잠겼고 제복은 배반했다. 제복이 명예가 아니라 수치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킬 상황이 안 되잖아요. 객실에 어떻게 갑니까? 누가 내보낼 겁니까? 참 답답하네…." 제복의 이 높은 목소리에 온 국민은 그만 철부지가 되고 말았다. 애썼다고 굳이 변명하지만 그들이 한 일이라곤 카멜레온처럼 거추장스러운 제복을 벗고 배를 버린 게 전부였다.

4월 맹골수도는 세월호를 삼켰다. 하지만 '도망친 선장'처럼 제복은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게 아니라 제 몸만 살렸다. 300명이 넘는 어린 아이들과 우리 이웃을 물밑에 버려둔 채 자기들만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그 은밀한 통로에서 명예와 자부심은 화석이 됐고 먼지처럼 흩어졌다. 관료라는 이름의 제복도 허둥댔다. 실종자 가족들이 체육관 바닥에서 난민처럼 나뒹구는데도 높은 의자에 앉아 라면에 열중했고 "장관님 오셨다"고 나발 불었다. 제복 깃만 빳빳이 세운 채 기념촬영에 정신이 팔렸고 "80명이나 구했으면 대단한데 해경이 뭘 못했나"며 악다구니를 해댔다. 이런 제복이 넘치니 절망이다. 얼마나 더 속을 시꺼멓게 태워야 제복의 기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선조실록'의 기사다. 선조 25년(1592년) 4월 29일 사관은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宮門)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禁漏)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국란의 모든 상황을 딱 한 줄로 묘사해낸 사관의 통찰력이 놀랍지 않은가. 2014년 4월 16일 아침나절 진도 맹골수도, 그곳에서도 금루는 끝내 작동하지 않았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에게서 참된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칸트는 '선한 의지'를 의무감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즉 선한 의지는 바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적 갈등이나 하기 싫은 마음에도 이를 억누르고 도덕적 요구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의무감을 다한 고(故) 박지영과 몇몇 승무원들이야말로 진정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 아닌가.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켰고 그 숭고한 의무감에 우리가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맹골수도에서 수많은 제복이 허우적댔다. 목숨을 대가로 선한 의지를 물에 던져 넣은 그들도 실종자다. 영혼의 실종자. 주관적 제한과 방해 때문에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를 질식시켜도 수수방관했다. 그렇기에 계약직 대리 선장이라는 이유도, 박봉이라는 변명으로도 본질을 가릴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숱한 맹골수도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거친 물살이 우리 영혼의 밑바닥까지 마구 흔들어대는. 그날, 과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그 숱한 백서는 표지조차 말갛고 제복은 스스로 먹칠했다. 그럴수록 냉정해야 한다. 눈 부릅떠야 한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려놓기까지. 성취보다 정신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집단인식이 바르게 자리 잡을 때까지.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아! 호모 에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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