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상원사 계곡의 문수보살

하나님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그분의 뜻을 거역해본 적도 없다. 사실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그랬다. 만일 그랬다간 어떤 벌이 내려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완서도 내 생각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남편과 외아들을 같은 해에 잃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면서 기도 같은 반항, 반항 같은 기도를 이렇게 했다. "사랑해서도 아니고, 당신을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살아 계셔서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속리산 정이품송 어귀에 이르면 단종을 죽인 세조가 떠오르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버려둔 하나님이 눈앞을 막아선다. "왜 처진 소나무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의 가마를 지나가게 하셨나요"라는 원망스러운 질문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묻지 않고 지나갔다.

이건 약과다. 오대산 자락인 월정사와 상원사 계곡에 들어서면 평소에 참아온 울분이 폭발할 지경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분노의 표현은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통해 배워왔기에 '하나님께서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유예하고 만다.

하나님은 역대 왕들이 저지른 인간 이하의 행위를 눈감아 준 적이 많다.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였지만 그를 83세까지 살도록 장수의 청복을 내려 주었다. 조카를 죽인 세조에겐 궁녀의 꽃밭 속에서 호의호식하며 노닐도록 했다. 하나님도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그런 분은 혹시 아닌지 모르겠다.

엿새 만에 혼자서 천지창조를 주도해온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기회에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권선징악이란 사자성어는 당신 스스로 만들어 놓으시고 정작 자신은 지키지 않고 계시다는 것이다.

권선징악을 소재로 한 대표 작품은 단연 서부영화다. 악당은 반드시 죽고 서부는 죽을 고생을 해도 마지막엔 반드시 살아남는다. 황야의 7인, 역마차, 석양의 갱들이 모두 그렇다. 영화의 귀재라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레이더스와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악당은 살아남지 못한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하나님께서 메가폰을 잡고 석양의 무법자에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악역 배우 리 반 클리프를 캐스팅하여 서부영화를 찍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목은 '뒤주 속의 1인'이나 '석양의 청령포' 등 아무렇게 붙여도 상관없지만 악당과 서부를 뒤바꾸지는 않았을까. MGM영화사의 심벌 로고인 사자가 포효하는 첫 자막 밑에 '감독 하나님'이란 소개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조가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세조는 죽을 때까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 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쳤다. 형수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꿈을 꾼 후 몹쓸 피부병에 걸렸다. 사가들은 '그건 피부병이 아니라 많은 궁녀와의 황음에서 비롯된 창병이 심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조의 상원사 나들이는 부처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려 종기가 낫기를 발원하는 행차였다. 세조는 물 맑은 오대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동승에게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몸을 씻고 난 후 세조는 "어디서든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마라"고 했다 그러자 동승은 "임금님도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고름투성이 종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감격한 세조는 문수보살의 모습을 남겨두려고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하루는 누더기 차림의 노승이 "제가 그려 보겠습니다" 하고 찾아왔다. 노승은 세조의 설명도 듣지 않고 문수보살을 그렸는데도 빼닮도록 그려냈다. "노스님은 어디서 오셨소" 하고 물으니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악당 세조에게 문수보살이 두 번이나 현신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건 문수보살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실수다.

세조는 그림을 토대로 목각상을 제작하도록 했다.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 바로 그것이다. 국보 221호인 동자상은 지금도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나는 늦눈이 내리는 지난 초봄에 상원사에 가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 심술궂은 날씨 때문에 월정사에서 발이 묶여 상원사에는 가지 못했다. 올여름에는 세조가 등을 밀어 달라고 했던 그 계곡에 풍덩! 빠져 볼 작정이다. 행여 문수보살을 만날까 하고.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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