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사회에서 나의 인기는 최상종가이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주워온 자식 취급하던 게 엊그제인데, 서점에는 동서양에 걸친 우리 집안의 내력과 작품들을 보기 좋게 재구성한 책들이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기업들은 조직 운영과 창의적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며 나를 탐구하느라 바쁘다. 정부도 '창조경제'를 한답시고 나를 추켜세우고 있다. 백화점, 지방자치단체, 평생교육원은 물론 교도소까지 나를 주제로 강좌를 만드느라 야단법석이다. 요즘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데는 내 이름 석 자가 꼭 필요하단다. 덕분에 나에 대해 좀 아는 학자들은 방방곡곡 불려다니느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돈 안 되는 친구와 신선놀음한다고 구박받았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감개무량이다.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산업화 이후 최고의 환대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이러다 나도 모르게 자아도취, 나르시시즘에 빠질지도 모른다.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감)할지어다.
애고 애고! 그러고 보니, 잠시 달뜬 기분에 비참한 현실을 잊고 경거망동했다. 부질없는 신세타령이라 나무라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주길 바란다. 나의 모태인 대학은 나를 말려서 죽이고 있다. 먹고살 길을 터 주기는커녕 쫓아낼 궁리만 하는 것 같다. 밥값을 못 한다나 어쩐다나. 나의 계통을 잇는 학생들이 취업이 잘되지 않으니 먼 일가붙이와도 한 살림(학과 통'폐합)을 차리라는 것이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미래첨단산업에는 나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면서도 나를 공부한 학생들에겐 일 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쪽 학생들은 주 전공보다 취업에 도움되는 복수전공에 눈을 돌리고 있다. 입사원서를 쓸 때도 복수전공을 알리는 데 주력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신세다.
인문학 열풍의 진원은 스티브 잡스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선불교와 명상에 심취하는 등 인문학 취향을 가졌다. 이런 경험을 정보통신기술에 접목시켜 아이폰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또 "문화 콘텐츠의 힘은 인문학에서 온다"며 기업경영과 첨단과학에 인문학을 접목할 것을 강조했다. 빌 게이츠 역시 "인문학이 없으면 나도 컴퓨터도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들의 입을 통해 인문학에 주목했다.
그런데 이 열풍이 반갑지만은 않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나를 아는 데서 출발해 남을 이해하고,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고 깨닫는 공부이다. 그리고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저항하고 비판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문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니,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이런 인문학 정신에 충실한가? 그런 흉내라도 내는지 의문스럽다. 인문학은 돈을 벌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느낌이 든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것이,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는 것은 인문학의 가르침이 아니다.
대학 울타리 너머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불지만, 정작 대학 안에서는 인문학이 고사 상태다. 인문 및 예술학과에 취업률을 들이대며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의 인문계열학과는 2011년 1천591개에서 2012년 1천574개, 2013년 1천548개로 3년 사이 43개 줄었다. 올해도 10개 대학이 인문학과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대학평가와 구조조정 정책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인문학은 사람에게 공기와 같다. 있을 땐 중요성을 모르지만 없으면 (사람답게) 살 수가 없다. 인문학은 모든 학문의 근원이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은 첨단산업에서 핵심적 요소이다. 하지만 실용적 접근, 단기적 투자로는 인문학적 성과를 낼 수 없다. 인문학은 그 특성상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만 꽃피울 수 있는 학문이다.
인문학적 양식은 어릴 때부터 길러야 한다. 학생들을 입시 준비와 암기식 공부에 목을 매도록 하는 교육 현실에서 인문학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읽고, 느끼고,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줘야 한다. 기업들도 이벤트성 인문학 강좌를 마련할 것이 아니라 문학, 철학, 사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을 채용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