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배롱나무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꽃인가 하면 나무이고 나무인가 하면 꽃이다. 배롱나무 이야기다. 예전에는 주로 선비의 사랑방 뜰에 심어졌으나 근래에 와서는 공원이나 길가에 더 많이 보인다. 봄꽃들이 제풀에 시들고 난 틈을 타서 여름 내내 홀로 피어난다. 무려 백일이나 붉게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다.

배롱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모양새부터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사랑 뜰에 알맞게 키가 너무 높지 않고 줄기도 담박하다. 봄꽃들이 설치는 호시절에는 나무인 듯 뒤편에 조용히 서 있다가 물러날 때쯤이면 민망한 듯 가지를 열어 보인다. 붉은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미 여름의 중턱이다.

아버지 역시 시절에 둔감했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응급실로 달려온 가해자에게 합의부터 덜컥 해 준 사실부터가 그러했다. 도장을 받아간 가해자는 엄마가 깨어났을 때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치료비 한 푼 당연히 내어 놓지 않았다.

"다 책임져 준다 했는데~." 아버지의 변명이었다.

엄마의 병이 깊어져 중환자실에 있을 때였다. 간호사가 위급 상황에 대비해 알부민을 준비해 두라고 했다. 출근하기 전 나는 알부민을 아버지 손에 들려주며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며칠 후 간호사가 알부민을 급히 찾았다. 아버지는 당황하며 대기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가만있자, 그 사람이 오늘은 안 보이네."

알부민을 대기실의 누군가에게 빌려 준 것이었다.

"급하다고 해서~. 돈도 없다고 하고."

아버지 돌아가신 후 배롱나무를 볼 때마다 산소에 한 그루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뜻 내키지 않는 이유는 배롱나무의 변심 때문이었다. 예전 사랑방 뜰에 단아하게 서 있던 배롱나무는 공원과 거리로 나앉자 키도 훌쩍 크고 꽃도 굵어졌다. 나무의 사회학이다. 나무도 때맞추어 성장점에 자극을 받으면 용도에 맞게 진화를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랑방에 미련이 없는 배롱나무는 무리 지어 제 세상인 양 으스대기 시작했다.

평생을 의심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던 무능한 아버지. 조선 중엽 어딘가쯤 뒷짐 지고 사랑방 뜰을 서성거렸으면 딱 좋았을 아버지. 나는 올해도 꽃집 앞에서 어린 배롱나무 묘목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쿠팡 대표와의 식사와 관련해 SNS에서 70만원의 식사비에 대해 해명하며 공개 일정이라고 주장했다. 박수영 ...
카카오는 카카오톡 친구탭을 업데이트하여 친구 목록을 기본 화면으로 복원하고, 다양한 기능 개선을 진행했다. 부동산 시장은 2025년 새 정부 출...
최근 개그우먼 박나래가 방송 활동을 중단한 가운데, 그녀의 음주 습관이 언급된 과거 방송이 재조명되며 논란이 일고 있다. 박나래는 과거 방송에서...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