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반려동물 키우기-천천히 인사하기

어릴 적 외가에 놀러갈 때면 외할머니네 밭에 꼭 들르곤 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이전의 기억들이 대부분이기에 그 당시에 정확히 밭이 어떤 모양새였는지까진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가는 길목 화단에 심겨 있던 샐비어를 따먹으며 밭으로 향하면 노지에서 자라는 한여름 딸기를 보기도 했고, 나무 위에 달려 있던 커다랗고 달달한 연두색 대추를 따먹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외가에 간 나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홀로 밭으로 향했다. 그런데 밭에 도착하자 그동안 못 보던 낯선 풍경이 보였다. 늘 식물만이 있던 그 공간에 닭 가족이 와 있었다. 닭들은 함께 무리지어 뒤뚱거리며 밭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난생처음 눈앞에서 닭을, 그것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닭을 만난 것에 흥분했던 나는 그길로 무작정 닭을 쫓기 시작했다. 나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닭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낮에 벌어진 추격전은 오래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의 행태를 참다못한 수탉이 나를 제지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 녀석은 내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부리로 내 무릎을 거세게 공격했다. 난 아픔과 동시에 깨달았다. '아, 난 그냥 단지 빨갛고 하얀 암탉들이 너무 통통하고 귀여워서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어서 쫓아갔던 것인데, 얘네들은 낯선 내가 이러는 게 무섭고 화가 나는 거구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동물과의 첫 만남에서도 '기본적인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꽤나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반갑다는 내 기분만 앞세워서 성급하게 다가가면 사람도 그렇듯 동물들도 여지없이 긴장하고 거부반응을 보였다. 설령 사람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성격을 가진 강아지라 해도 첫 만남에서만큼은 조금은 경계하는 기색이 보이곤 했다. 하지만 이런 만남들을 거치면서 덕분에 이젠 동물들과 첫 마주침에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수의사분이나 전문가분들이 하듯, 처음엔 눈을 마주치고 손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해 주면서 서서히 동물들과의 간격을 줄여 가면 녀석들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급하게 말고 천천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얼마 전 친한 언니와 카페에 갔다가 카페 주인의 반려동물인 라쿤(아메리카 너구리)을 만났다. 처음 내 곁으로 다가온 녀석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나더니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고 잠시 후엔 천연덕스럽게 내 무릎 위에 자신의 뒷발을 올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까지 치며 놀았다. 그러고는 마치 앨리샤처럼 내 옆에 발라당 눕기도 했다. 이런 너구리 아가씨의 행동에 같이 있던 언니가 '너희 집 너구리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그날 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내게 딱 붙어 있는 너구리의 행동이 나도 신기했기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서 체셔와 앨리사에게서 나는 '동물 냄새'가 나서 얘가 이러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너구리 아가씨 말고도 다른 동물들도 이제는 예전처럼 나와 마주친다고 해서 경계부터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손을 내밀어 주면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길고양이들 중에서는 마음 아프게도 사람에 대한 경계를 전혀 풀지 않는 녀석들도 많지만 말이다. 그래도 조급하지 않게, 그리고 진실된 마음을 담아 천천히 다가가면 누구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의 간격을 줄일 준비를 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건 매한가진 것 같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누구에게나 말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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