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풋 열아홉 살 때였나, 초가을 고운 햇살이 사과에 붉은 자국을 자근자근 찍어내던 어느 과수원 나른 나른한 풀밭이라 기억이 된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그늘 아래, 깜찍한 세일러복 여학생의 쭉 뻗어 내린 무릎을 베고 누운 한 머슴애가 그 여학생의 얼굴을 그윽이 올려다보며 소곤소곤거리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길을 지나다가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나무 뒤에 살짝 숨어 숨죽이며 엿보았는데, 그 여학생은 바람결에 귀밑머리를 한 번씩 쓸어 올리며 또록또록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닌가. 그 풍경이 어찌나 샘이 나도록 아름답던지, 나도 이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의 무릎에 눕혀 놓고 책을 읽어 주리란 생각을 하며 열아홉 살의 그 빛 부신 풍경을 가슴에 고이 밀봉해 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가 1994년에 개봉되었으니 '책 읽어주는 여자'의 발상은 그 영화 이전에 이미 그 과수원 풀밭을 지켜보던 한 처녀의 가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풀벌레가 점점 잠 못 이루고 울어댄다. 뜰의 잎 뒤척이는 소리 속을 거닐다가 오래된 책 한 권을 펼쳐든다. 어느 가을날 밤에 오빠 친구가 쑥스러워하며 마룻바닥에 냅다 던지고 간 한 권의 책 선물, 고운 표지의 시집이었다. 그 책 선물을 받아 안고 삼십 촉 알전구 아래에서 육십 촉의 알전구처럼 온몸이 달아오르며 읽고 읽었던 그 시집(詩集), 시를 대강대강 읽고 만 것이 아니라 그 시 한 편 한 편이 풀잎에 앉은 이슬처럼 촉촉이 내 가슴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밤에 잠 못 이루고 몰입했던 시편들이 지금 이렇게 시의 길을 걷게 한 마중물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은 탓에 안질이 나서 초정약수에 눈을 씻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링컨 대통령 역시도 어릴 때 가난하여 책을 빌려 읽다가 책에 비를 맞혔다는 일화가 있다. 이분들의 그 비범한 능력이나 사고력과 창의력, 통찰력은 다 독서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이 트렌드인 지금,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탄생 201주년이었던 지난해 서울시청에서 열린 '서울 공유 경제를 말하다'가 뭇시선을 끌었다. 국민의 도서관이 탄생한 것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책을 한 곳에 모아 온라인을 통해 빌려주고 빌려볼 수 있는 공유 시스템이다. 즉 온라인 도서관 서비스다. 이렇게 되면 독서를 통해 삶의 질을 보다 높이고 지적 능력과 마음의 양식이 가을 들녘만큼이나 풍성하게 되지 않을까. 요즈음 일부 학교에서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업 시간 한 시간 전에 책 읽어주는 어머니모임이 있다고 한다. 다들 눈이 초롱초롱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고 한다.
박숙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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