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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가을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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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물이 하도 맑고 깨끗하여 소발자국에 고인 물도 그냥 마신다는 말이 있다. 이토록 청명한 날씨에, 노릇노릇한 햇살이 아까워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털어 넌다. 마음도 쾌청하여 휙 둘러보니 주택가의 울긋불긋한 감이며 저 멀리 보이는 앞산에 가을이 그리움을 앞세우고 조용히 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은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가을 편지'라는 시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1~3절 노랫말 끝에 외로운 여자가, 모르는 여자가, 헤매인 여자가 아름답다고 '고은' 시인은 참 절절이도 표현을 했다. 그렇다. 가을날에는 수성못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스카프를 휘날리는 여인의 뒷모습이 왠지 외롭고 쓸쓸하게 비치며, 바위처럼 붙박여 있는 여자보다는, 일탈하여 여행길에라도 올라 가을을 만끽하고 그 가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해보는,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보내고 받아보고 싶은 센티멘털한 여자가 그냥 아름답지 않을까! 하고 '가을 편지' 시 구절구절에 빠져들게 된다.

잉크를 찍어가며 밤이 새도록 펜으로 편지를 써 본적이 언제 적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주인공 70대 할머니께서 꽃 편지지에다가 책갈피에 끼워둔 꽃잎이나 단풍잎을 편지 속에 넣어 시집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부치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달콤한 초콜릿을 머금듯 유심히 시청하노라니, 그 소담스레 웃으시는 소녀 할머니의 때묻지 않은 정서가 바깥세상의 혼탁함을 말끔히 다 씻어주는 느낌을 받았다.

소중한 분에게 마음을 담아내는 데 있어 써내려가다 고치고 또다시 깊은 생각으로 고쳐가며 쓰게 되는 편지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한 통의 편지 속에는 어마어마한 위대함마저 들어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메시지는 후대 저항운동의 물꼬를 바꿔 놓았으며, 냉혹해 보이는 이미지의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구레나룻 수염을 길러 보세요'라고 어느 소녀가 보낸 진심 어린 한 통의 편지는 미국 역사의 전기가 됐다고 하지 않는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 지쳐서 단풍드는데.

서정주 시 '푸르른 날'의 한 구절이다. 시 구절 중, '초록 지쳐서 단풍드는데'. 아, 이 구절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절창이다. 초록 지쳐서 단풍든다는 말은, 참 열심히 살았다는 뜻일 게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지치도록 열심히 살지 않고서는 물들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시를 대할 때마다 초록이 지쳐 단풍들도록 너는 열심히 살았는가? 하고 아직, 덜 여물어 숙이지 못하는 벼 같은 나에게 쓸쓸히 자문해보는 것이다.

박숙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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