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그룹채팅' '밴드' 등 동창 관련 SNS가 활성화되면서 달라진 현상 중 하나가 바로 그동안 못 보던 친구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이버 동창 모임이 새로운 동기 발굴에 영향을 끼쳤다는 방증인 셈이다. 졸업하고는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하는 동기들은 각자가 알고 있는 친구들의 동정을 전하기도 하는데, Y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Y는 고교 1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다. 귀염성 있는 얼굴에 잘 웃던 Y는 시골서 온 어수룩한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는 걸 좋아했다. 우리는 수업이 파하면 걸어서 대구백화점으로 놀러 가곤 했다. 괜히 할 일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쓸 곳도 없는데 예쁜 편지지를 사기도 했다. 두 프로 동시 상영관인 동신극장이나 칠성극장을 찾기도 했다. 화장실 냄새 나던 극장에서 본 '별들의 고향'과 진추하의 '사랑의 스잔나'가 그때의 영화들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Y는 무척 불우한 환경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연로하신 아버지와 함께 큰형님한테 얹혀살고 있었다. Y의 형수 입장에서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 자식보다 어린 시동생의 양육이 결코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밖으로 돌았다. 겉으로는 명랑했지만 가슴엔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암울한 기억을 지우려고 억지로 그렇게 웃음을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졸업을 하고는 서로의 갈 길을 갔다. 우직한 촌놈인 나는 큰 꿈을 이룬답시고 고생을 사서 하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사회 적응이 어려워 애를 먹고 있었다. 나이가 한참 많은 연상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그즈음 우리의 연락도 두절되고 말았다. 1990년대 초이던가? 자신을 꼭 빼닮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모교 운동장 모임에 나와 즐거워하던 적이 있었다.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으리라.
Y의 소식은 잠시 나를 과거로의 여행에 초대를 해주었다. 촌뜨기 시골 소년에게는 낯설게만 다가왔던 도시의 풍경들! 페인트를 칠하지 않아 이끼가 낀 '고색창연'의 콘크리트 교사, 붉은 벽돌로 지은 중세 고딕 양식의 도서관 건물,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의 주교관 등 영혼이 여물어가던 고교 시절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라이 탕탕!' 안내양이 온몸으로 밀어 넣던, 그 물컹거리던 싫지 않던 기억도 아련하다. 친구여! 부디 그 세상에서는 행복하길.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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