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국채보상운동 발원 '북후정', 대구읍성 서문 밖에 있었다"

첫 집회 북후정, 첫 발의 광문사 현재 위치와 다른 주장 제기

서문시장 입구에 있었던 북후정. (원안)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서문시장 입구에 있었던 북후정. (원안)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국민이 제국주의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모금을 펼친 국채보상운동(1907~1908)의 최초 집회가 열린 '북후정' 및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발의된 '광문사' 터가 현재 알려진 곳과 다르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북후정은 대구읍성 북쪽이 아닌 서쪽에 있었고, 광문사는 대구수창초등학교 인근이 아니라 경상감영 안에 있었다는 것. 지난달 22일 오후 7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주최, 나눔과책임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북후정'광문사 위치 고증 세미나'에서 나온 내용이다. 이들 주장이 맞다면 역사책과 안내판 기록을 고치고, 관련 기념비와 표지석도 자리를 옮겨야 할 판이다.

◆북후정, 대구읍성 서쪽에 있었다?

북후정은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 관련 최초 집회인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곳이다. 그 터는 현재 대구시민회관 자리로 알려져 있고, 1997년 '국채보상운동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에 대해 임경희 대구소비자연맹 회장은 세미나 발표에서 "북후정은 대구읍성 북문 밖이 아닌 서문 밖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북후정 위치가 잘못 알려진 이유는 1995년 2월 간행된 '대구시사 제1권(통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에서 북후정의 위치를 '대구시민회관 부근'이라고 기술했고, 연구자들이 이를 그대로 인용하며 북후정의 위치를 대구읍성 북쪽으로 단정했기 때문이라는 것.

임 회장에 따르면 1888년 자인현감 오홍묵이 지은 '자인총쇄록'에는 북후정 위치가 서문시장 입구로 나와 있다. 당시 서문시장은 192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기 전까지 옛 동산파출소에서 현재의 오토바이 골목까지, 즉 대구읍성 서쪽에서 달성 사이에 있었다. 또 1907년 3월 29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는 '서문 밖 북후정'이라는 표기도 있다. 임 회장은 "일제에 의해 파괴돼 흔적을 잃은 북후정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 그동안 잘못 표기된 기록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문사, 경상감영 안에 있었다?

출판사였던 광문사는 1907년 2월 중순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곳이다. 그런데 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이진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광문사가 현재 표지석이 있는 대구수창초교 후문 대성사 자리에 있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광문사가 경상감영 내 취고수청을 빌려 쓴 기록은 확인된다. 취고수청은 요즘으로 치면 군악대를 관장하던 곳으로, 경상감영 관풍루 동쪽에 있었다.

이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광문사는 1906년 1월 대구읍성 서문 밖 달서교 인근에 설립됐고, 같은 해 5월 경상감영 내 취고수청으로 이전한다. 이후 경북관찰사 서리도 함께 맡은 대구군수 박중양에 의해 쫓겨날 때(시기 미상)까지, 적어도 1907년 3월까지는 머물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즉 김광제와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을 때, 광문사는 취고수청에 있었다는 얘기다. 이 학예연구사는 "현재 경상감영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대구시는 취고수청 복원을 비중 있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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