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나무'는 훈민정음 반포 7일 전 벌어진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드라마다. 이정명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이 드라마는 물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만든 '각색실화'(팩션)이지만 우리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글이 창제되고 반포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힘들게 만들어지고 배포된 한글은 오랜 세월 동안 천대받고 탄압받아왔다.
9일은 568번째 한글날이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중국의 외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제 식민지 시절처럼 한글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글이 천대받고 탄압받던 그때에 비해 우리가 한글을 더 아름답게 쓰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머뭇거려진다. 단순히 욕설을 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한글을 아름답게 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신문은 한글날을 닷새 앞두고 한글을 더 아름답게 쓰는 방법을 같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전이나 옛 글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낱말들을 찾아 지금도 널리 쓸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또 누리망(인터넷)과 누리소통망(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많이 드러나는 어긋난 맞춤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봤다. 그리고 한글이 생활용품이나 옷, 집 등에 적용된 사례도 찾아봤다.
이걸 (사진의 원 안) 무어라 부를까? 책을 읽다가 읽은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끼워두는 작은 종이쪽지다. 학생들이 시험 범위를 표시할 때도 요렇게 작은 접착식 메모지를 붙여둔다. 문구점에 가면 이런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메모지나 테이프들을 판매하고 있다. 이런 제품들의 품명에는 대부분 '플래그', '인덱스 테이프', '페이지 마커'와 같이 번역되지 않은 그대로의 외래어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시험 범위 쪽 수를 표시하는 이 조그마한 종이를 우리말로 고쳐 쓸 수는 없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니 이 제품의 외래어 표기를 대체할 만한 우리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찌지'(찌紙)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찌지'의 뜻을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을 표하기 위하여 글을 써서 붙이는 좁은 종이쪽'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플래그' 등의 제품 용도와 동일한 정의다. 백두현 교수(경북대 국어국문)는 "낚시에 쓰이는 '찌'의 용도와 의미를 가져와 쓴 말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낱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전과 옛 한글문헌에는 살려 써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한글 낱말과 표현들이 숨어 있다. 한글날을 앞두고 옛 한글문헌과 사전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한글 낱말과 표현들을 찾아봤다.
◆음식조리서와 편지글에서 아름다운 한글을 찾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음식조리서에는 지금 때에도 살려 쓸 수 있는 한글 낱말이 수두룩하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음식조리서 대부분이 한글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음식디미방'과 같은 조선시대 음식조리서들은 대부분 종갓집의 맏며느리들이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순한글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글의 옛 모습을 더욱 생생히 볼 수 있다"며 "음식이 조리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의성어, 의태어가 많이 쓰였기 때문에 우리말의 말 맛이 살아있는 낱말들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백향주 담그기'를 설명한 부분 중 일부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자란자란'은 '액체가 그릇에 가득 차 가장자리에서 넘칠 듯 말 듯한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또 '주방문'이라는 또 다른 옛 한글 음식조리서에 '워석워석'이라는 낱말이 등장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워석'이 '얇고 뻣뻣한 물건이나 풀기가 센 옷이 서로 세게 스치거나 부서지는 소리'로 정의돼 있다. 이 표현이 현대에 쓰인 용례로는 웹툰 '마린블루스'에서 찾을 수 있는데 '어석버석'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등장했다. 한마디로 '튀김류의 바삭한 식감을 표현할 때 쓸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 편지를 묶어놓은 문집도 숨어 있는 한글 표현의 보고다. 백 교수는 조선 중기인 1610년 전후에 쓰여진 '현풍곽씨언간'에 등장한 표현을 소개했다.
'여느 여러 말은 다 내 탓인 듯하거니와 자네는 어느 경황에 먼 발 굴러 말하여 계신고. 자네 먼 발 굴러 말을 아니 하면 이제 와서 자네 가슴 태울 일을 내가 할 리야 있겠소'
이 문장에서 '먼 발 구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안타까워하거나 다급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발을 동동 구르다'와는 다른 관용 표현이다. 백 교수는 "한옥 대청마루는 한 쪽에서 발을 구르면 그 울림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진다"며 "멀찍이 덜어져 분명치 않은 일을 자기식으로 지레짐작해 말하는 태도를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 동포의 수필 속 우리말
고유어 위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매일신문이 매주 목요일 발행하는 '주간매일'의 '삶 속에서'라는 코너에 글을 쓰는 류일복(44) 씨가 바로 그러한 예다. 류 씨는 30살까지 중국 연변에서 살았던 중국동포 수필가로 그가 쓴 수필에는 평소 접하지 못했던 순수 우리말 표현들이 자주 등장해 독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삶의 터를 한국으로 옮긴 류 씨의 생활을 힘들게 한 부분 중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었다. 류 씨는 "연변 말투를 고치기 위해서 한 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름다운 우리말 배우기'"라고 말했다. 류 씨는 틈나는 대로 고유어를 찾고, 그것들을 외웠다. 사전을 뒤적이며 기록해 둔 컴퓨터의 메모장은 류 씨가 글을 쓸 때 항상 참고하는 '낱말의 보물창고'다. 그 덕분에 류 씨의 글 속에는 일상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고유어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수필답게 순수 우리말 형용사가 눈에 많이 띈다. 7월 17일 자 '삶 속에서' 글에는 "저탄소 녹색성장 홍보에 앞장서야 하는 대목에 중뿔나게 기독교 책을 든 선교사가 나타나서(…)" 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여기서 '중뿔나다'는 '어떤 일에 관계없는 사람이 불쑥 참견하며 나서는 것이 주제넘다'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8월 14일 자 '내 맘에 상처로 남았을 때' 글 속에는 '까무끄름하다'는 말이 나온다. 까무끄름은 '조금 어둡게 까무스름하다'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이 외에도 '겨끔내기'(서로 번갈아 하기), '건입맛'(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주 적은 양으로 조금만 먹는 일), '꼬막손'(손가락이 짤막한 조막만 한 손) 등이 있다. 이 같은 고유어 덕분에 류 씨의 글은 더욱 풍성해진다.
류 씨는 한국 사람들이 비록 옛날 말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말을 잊어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찾아보면 좋은 말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외래어가 쉽게 쓰이는 것이 안타깝다는 입장이다. 그는 "고유어에는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외래어에는 왠지 모르게 딱딱한 느낌이 들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외래어가 멋있다는 생각에 글 속에 써보기도 했지만 고유어가 글을 더 포근하게 만들어준다고 느껴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고 있어요"라며 고유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그 때문인지 류 씨의 글에서는 외래어를 찾아볼 수 없다. 외래어를 쉽게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류 씨는 고유어를 찾아 쓴다. 7월 31일 자 '배추김치 연가'에 등장하는 '어울참'이 그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 류 씨는 '어울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브런치'(brunch)라고 쓰는 아침 겸 점심을 우리말로 다듬은 말이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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