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속으로] 고리오 영감을 위하여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 고리오 영감은 지독한 부성애를 지닌 인물이다. 제면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두 딸의 행복을 위해 거금의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고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딸에게 내쫓기다시피 하여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독거 생활을 시작한다. 딸들은 돈이 필요할 때만 아버지를 찾는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애장품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는 결국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된다. 죽기 직전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두 딸들을 보기를 소원하지만, 큰딸은 부부싸움 하느라 작은딸은 간밤의 무도회 참석으로 피곤해 잠자느라 오지 못한다. 죽기 직전, 그가 끝내 오지 않는 두 딸을 원망하며 중얼거리던 말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 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

비록 소설 속이긴 하지만, 180년 전 이국 노인의 씁쓸한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비극이다. 산업화 이전만 하더라도 경로사상, 하면 우리나라가 단연 으뜸이었다. YMCA 초대 회장을 지낸 선교사 게일(G. S. Gale)이 "조선은 노인의 천국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조선에서 태어나 노인으로 살다 죽고 싶다"고 고백할 정도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노인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우리의 경로 환경이 형편없이 곤두박질쳐 이제는 부러운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운 대상이 되었다.

지난해 노인의 날을 맞아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600만 명을 넘어섰다. 10년 뒤에는 노인인구 1천만 명 시대를 맞을 전망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노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기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0년째 1위라는 불명예 속에는 노인 자살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노인 빈곤율을 보면 노인 인구의 절반이 빈곤층이다. 이들 중의 상당수는 사회의 무관심과 가정의 냉대 속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에게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다.

일본에는 노인을 위한 거리가 있다. 이른바 할머니들의 하라주쿠(原宿)라 불리는 스가모(巢鴨) 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연간 900만 명이 이용한다는 스가모 거리는 노인을 위한 상품을 파는 점포가 물경 200여 개나 오밀조밀 들어서 있고 이곳의 음식, 상품, 편의 시설 등은 철저하게 노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서울시는 이미 재작년에 보건복지부와 함께 종묘'탑골공원 주변을 일본의 '스가모 거리'처럼 조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환경 개선을 위한 설계 용역을 발주했다. 현재 종묘'탑골공원 주변에는 노인복지센터, 무료급식센터, 저가 이발소, 실버영화관, 노인용품 상점 등이 들어서 있고 이곳으로 몰려드는 노인들이 하루 최대 3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다행히 대구에도 지난달 26일 실버영화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이 영화관은 객석 138석을 보유하고 노년 세대를 위한 추억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한다.

10월은 경로의 달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10월 2일 '노인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해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달, 그런 날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10월을 보낸다. 관계 당국은 기념식 같은 일과성 경로 행사로만 그칠 게 아니라 '경로헌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인 복지 증진을 위해 하루속히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날로 곰비임비 증가하는 '고리오 영감'을 줄일 수 있고 머잖아 다가올 노인 1천만 명 시대를 슬기롭게 맞이할 수 있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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