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의 고대 이집트실에 들어서면 크기 때문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흉상이 있다. 강력한 파라오의 힘을 상징하고자 거대하게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이 조각상을 본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셸리는 '오지만디아스'를 지었다. 그 시와 제목이 같은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오지만디아스 퍼레이드'라는 작품이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왔다. '터전을 불태우라'는 얼핏 듣기에 다소 섬뜩한 느낌을 주는 광주비엔날레 주제에 딱 맞는 작품이다. 현대사의 치부를 드러내는 온갖 종류의 전쟁과 약탈의 잔혹극을 묘사한 이 작품은 2012년 프랑크푸르트 쉬른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로 설치됐다. 또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제시카 모건이 유럽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키엔홀츠의 작품이 선택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키엔홀츠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주류이던 1960년대부터 파렴치한 현대문명에 지독한 비판을 가해온 예외적인 미국 작가이기 때문이다.
백인 중산층의 취미를 경멸하고 관습에 거칠게 저항하는 작가들의 경향이 오늘날 유럽 현대미술에서 주된 관심을 받고 있다. 대체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영향 아래 세련된 형식미를 추구해온 미국 미술과 달리 유럽은 조형적인 형식을 존중하는 작가라 하더라도 풍자나 패러디의 신랄함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기원은 1980년대 추상미술의 침묵 상태를 깨고 등장한 신구상, 신표현주의자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가장 빈번하게 조명되고 있는 작가들 가운데 독일신표현주의자로는 바젤리츠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절단되고 토막 난 동물들을 그린 것은 누가 봐도 분단된 독일을 상징한다. 분단 독일이 빚은 온갖 모순들은 그의 다음 그림으로 이어졌다. '뒤집힌 이미지'를 통해 분단으로 겪게 된 개인의 고통을 널리 쉽게 알린 작가도 없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작가로 손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2011년 겨울 런던 테이트모던과 2012년 여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그는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화두로 작업하는 작가다. 미술사의 전 지층을 다 조사하듯 모든 사조를 기법적으로 섭렵하며 다양한 양식의 그림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의 명성은 역시 금기의 대상이었던 나치 시기에 겪은 어두운 트라우마를 회상한 것에서 시작됐다. 1961년 서독으로 넘어와 동료들과 '자본주의 리얼리즘 그룹'을 결성한 뒤 자신들을 '독일 팝 아티스트'로 정의했었다. 바로 그 무렵 정치적 금기에 도전했던 또 한 명의 동료 시그마 폴케의 회고전이 다음 달 테이트모던에서 '알리바이들'이란 제목 아래 열리게 된다.
같은 신표현주의 작가로 나치의 전쟁 범죄를 환기시킨 문제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안젤름 키퍼는 약간 그 배경이 다르다. 서독 출신이면서 1945년생으로 당시 가장 젊은 전후 세대였던 그는 나치시대의 상처를 가장 예민한 표현으로 드러내 물의를 일으킨 작가다. 다소 충격적이었던 그의 도전은 일찍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초청을 받았고 뒤이어 전 미국을 순회전시할 정도로 독일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크게 조명됐다. 2012년 한 해에만 독일의 본과 뒤스부르크, 바덴바덴, 런던의 화이트 갤러리 등 4곳 이상에서 그의 대규모 전시회를 보았다. 또 지금은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을 갖고 있으며 작업량도 엄청나다. 그 많은 전시회에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내놓고 있다.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모호하고 불확실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품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경향 때문으로 생각된다. 독일의 부끄러운 과거, 나치 시기의 범죄를 성찰하는 것을 작업의 중요 모티프로 삼은 것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혁명을 화폭 위에서 과감하고 꾸준하게 실행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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