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문 가치, 안동에서 찾다] ②수백 년 정신문화 지켜온 '종가 종손'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퇴계의 가르침 후손들에 계승

한국의 정신문화 가운데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선비정신은 대표적 정신문화 유산이다. 종가와 종손들은 이 같은 정신을 오늘날 오롯이 실천하고 이어오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 퇴계 16세손 이근필 종손이 학생들에게 선비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엄재진 기자
한국의 정신문화 가운데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선비정신은 대표적 정신문화 유산이다. 종가와 종손들은 이 같은 정신을 오늘날 오롯이 실천하고 이어오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 퇴계 16세손 이근필 종손이 학생들에게 선비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엄재진 기자

'경'(敬).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인문가치와 정신문화는 안동지역 숱한 '종가'와 '종손'들에 의해 수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퇴계 선생이 낙향해 안동에서 살고 있을 때 한양 살던 손자며느리가 종손을 낳았지만 산모의 젖이 돌지 않아 애를 먹었다. 당시 안동에 있던 여 노비가 같은 시기에 애를 낳았다. 서울 아들 내외는 그 여 노비를 서울로 올려 보내 달라고 기별해 왔다. 노비가 주인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었지만 퇴계는 거절했다.

퇴계는 "내 아이 살리자고 남의 아이 젖을 끊을 수 없다"고 했다. 노비의 아이가 좀 자라고 나면 그때나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결국 선생의 종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지고 말았다.

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사람답게 여겼던 '인본 가치'의 정신을 단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에게는 대를 잇는 것보다 세상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더 큰 가치였다. 그 정신은 후손에게 대물림되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종가의 맏형, 퇴계 종가'종손이 변한다.

예로부터 유가에서 '종가'와 '종손'은 그 자체로 제도였으며 법이었다. 수백여년 세월이 지나면서도 선조들의 가르침과 유가의 예법을 잊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전통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종가의 맏형격인 퇴계 종가와 종손이 개혁적 움직임을 보이면서 종가들이 변하고 있다. 올해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퇴계 종가는 불천위 제사를 초저녁에 지내기로 정해 유림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1월 7일, 퇴계 종가의 문중의결기구인 상계문중운영위원회(이하 문중운영위)는 퇴계 불천위 제사를 위해 안동시 도산면 퇴계 종택에 모인 자리에서 참석자 65명이 만장일치로 내년부터 불천위 제사를 오후 6시에 지내기로 의결했다.

이에 앞서 퇴계 종가는 2011년, '종손 말이 법'으로 통하는 종가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문중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종손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210명으로 구성된 문중운영위는 종손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퇴계 문중 최고 의결기구로 자리 잡았다.

문중운영위는 제사 간소화를 추진했지만 불천위인 퇴계와 두 부인의 제사만큼은 자정을 고수해왔다. 운영위는 "퇴계 선생은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라'고 가르쳤다"며 초저녁 불천위 제사를 통과시켰다.

이 밖에 퇴계 16세손인 이근필(82) 종손은 "죽으면 납골당에 가겠다"고 했으며, 17세손인 이치억(38) 차종손도 "제사가 간소화되지 않으면 종가의 미래는 없다"는 말로 종가의 개혁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종길 학봉 종손은 "종가와 문중이 유교적 보수주의로만 뭉쳐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짐작은 시대와 함께 변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들로부터 이어오는 인문정신과 철학은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고 했다.

◆불천위 종가 종손들, 인간성 회복운동 나섰다.

유교문화가 지탱해 온 사회는 인간 윤리 가치관이 살아 있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나라에 충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가치였다. 더불어 사람을 공경하고, 옳고 그름에 주저하지 않았던 실천적 모습들이 유가의 생활 철학이었다. 하지만 물질만능, 과학이 발달된 현대사회에서 이 같은 윤리 가치는 사라지고 있다.

경북지역 불천위(不遷位) 종가 종손들이 '영종회'(嶺宗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인간성'도덕성 회복 운동에 나선 이유다.

경북지역 불천위 종가 종손 90여 명은 지난 2012년 '영종회'를 창립, "수천 년간 전승되어온 미풍양속과 윤리 가치관이 붕괴되고 부도덕하고 반인륜적 행태가 발생하는 현실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선조들의 옛 유교 정신을 현대에 구현하자고 뜻을 모았다.

김종길 영종회 초대회장은 "수천 년 계승된 미풍양속과 윤리 가치관이 붕괴되는 현실에서 선조들이 물려주신 유교문화를 겸허하게 받들어 오늘의 혼란을 극복하고 도덕이 살아있는 반듯한 윤리사회 구현에 진력하겠다"고 말했다.

경북을 대표하는 정신문화는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선비정신은 정신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이 같은 정신을 오늘에 이어준 큰 물줄기 중의 하나가 종가 문화다. 또 종가 문화를 실천해오고 있는 이들이 종손들이다.

특히, 이 시대에서 필요로 하고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문화적 긍지, 정신문화의 원천이 종가에 있기 때문에 종가와 종손들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종가포럼'문양'음식 등 종손'종가 문화 키운다

최근 들어 학계 등에서는 종손과 종가문화를 지키고 가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시대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문화적 긍지, 정신의 원천이 종가에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종가를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선비정신도 한국의 정신적 뿌리 중 하나이다. 종가는 물질 중심의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자랑스러운 정신문화를 길러내고 간직해 오늘에 전해 온 중심지다.

오랫동안 유교적 정신문화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이뤄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는 동안 전통윤리와 가치관은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채 마련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길러지고 이어지고 있는 선비정신, 전통사회 공동체적 이념을 알리고 보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경북도는 종가를 지켜온 종손'종부들의 역할 중요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2009년부터 '종가문화 명품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종가포럼'을 개최하고 종손들의 모임인 '영종회'와 종부들의 모임인 '경부회'가 발족했다. 종가에 묻혀 박제화된 종손과 종부가 아닌 생명력이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한다.

안동시도 종가'종손들의 문화 보존과 전승을 위해 종가별 문장'인장 디자인 개발, 종가음식 산업화 등에 나서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종가를 명품화해 세계적 브랜드로 발전시키겠다는 각오다.

안동 엄재진 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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