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7일 안동 임청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문들이 있지만 그중에 찬란하게 빛나는 독립운동의 명문가를 들자면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간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과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의병투쟁으로 일생을 바친 구미 왕산 허위 선생 가문 그리고 3대에 걸쳐 항일투쟁에 헌신한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내신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을 꼽을 수가 있다.
1895년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지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잃은 나라를 찾는 것은 백배 천배 더 어렵다"는 말씀을 남기고, 외숙인 안동 초대의병장 권세연이 의병을 일으킨 데 때맞춰 30여 년 성리학에 전념하시던 일을 버리고 의진에 참여하고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구축하였다.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오백 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중략)…,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선생은 통한의 거국음(去國吟)을 남기고 1911년 새해 벽두 조상의 위패를 땅에다 묻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가산을 처분해 50여 가구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아흔아홉 칸 고택 임청각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나라를 찾기 전에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2년 5월 선생은 중국 서란현에서 서거하였다. 만주 독립단체인 서로군정서와 정의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외아들 이준형은 석주의 영위(靈位)만 모시고 반혼제를 드리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0여 년 동안 일제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를 받아 오던 중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라는 피묻은 유서를 남기고 67회 생일에 자결하였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 독립운동 무장단체인 통의부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감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와 더불어 석주 선생이 태어나신 임청각은 아홉 명(석주 선생, 아들 준형, 손자 병화, 동생 상동 봉희, 조카 형국 운형 광민 승화)의 독립투사가 한 곳에서 배출된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내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늦게나마 국무령 이상룡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만시지탄은 있지만 잘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념사업회의 일차적인 목표인 일제에 의해 임청각을 동강 내 버린 중앙선 철로 이설과 오백 년 된 고택은 복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 바친 재산 나라가 되찾아 줘야 한다"는 감명 깊은 축사를 새겨들으며 비록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란격석'以卵擊石)와도 같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석주 선생의 선비정신이야말로 천추에 빛날 것이다.
1919년 자신이 이끌어온 서로군정서와 한족회를 상해임시정부 밑의 조직으로 들어가도록 양보하면서 "정부를 세우기는 때가 너무 이르다. 그러나 이미 세워진 바에야 어찌 한 민족이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자"고 했다는 석주 선생의 말은 기득권 싸움으로 불신과 분열로 얼룩진 현 세태에 큰 울림으로 들린다.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일이었다. 또 다음 달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러한 기념일들은 일제강점기 고난과 투쟁의 역사로 탄생한 날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회의 첫걸음을 통해 후세들에게 민족정기 선양에 매진하기를 기원해 본다.
오상균/광복회 대구시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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