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년 달성 꽃피다] <8>한국 첫 피아노, 사문진으로 들어오다

피아노 옮기던 짐꾼들 건반 소리에 놀라 "귀신통이다" 줄행랑

1900년 3월 26일 선교사 사이드보텀이 아내 에피를 위해 피아노를 들여온 3일간의 여정을 세세하게 그려낸 다큐뮤지컬
1900년 3월 26일 선교사 사이드보텀이 아내 에피를 위해 피아노를 들여온 3일간의 여정을 세세하게 그려낸 다큐뮤지컬 '귀신통 납시오' 공연이 지난해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에서 펼쳐졌다. 달성군 제공

나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사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텀(한국 이름 사보담'1874~1908)이다. 아내 에피와 결혼한 직후인 1899년 9월 6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 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미국 호놀룰루~일본 요코하마~도쿄~시모노세키~나가사키를 경유해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해 하루 묵었고, 사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대구에 도착했다.

◆낙동강 뱃길로 옮겨온 피아노

바로 이듬해인 1900년 3월 26일 아내 에피의 피아노가 처음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도착했다. 사람이나 물건이 부산에서 대구로 들어오려면 딱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는 육로이고 두 번째는 수로였다. 육로는 부산~밀양~청도를 거쳐 팔조령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수로는 부산에서 뱃길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화원의 사문진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다.

미국에서 출발해 부산포에 내려진 아내 에피의 피아노는 워낙 무거워 나귀나 마차로 험준한 육로를 통할 수 없었다. 결국 뱃길을 이용해 사문진까지 들어왔다.

내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고학윤(高學崙) 선생에게 사문진에 내려진 피아노를 10마일(16km) 정도 떨어진 대구 종로까지 옮겨야 한다고 하자, 고 선생은 사흘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고 선생은 피아노를 옮기기에 필요한 도구와 짐꾼 20명을 모았다. 짐꾼들은 1인당 60센트를 요구했다. 그보다 낮은 운임비를 제시해봤지만 협상은 결렬되고 그들은 모두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시 고 선생에게 짐꾼을 부탁하자 새로 20명을 주선해줬다. 이번에는 운임비는 처음의 절반 수준인 1인당 30센트에 결정됐다.

점심을 먹고 짐꾼을 불러모아 출석을 부르니 20명보다 2명이 많은 22명이었다. 2명을 추려내 집으로 돌려보낸 후 남은 짐꾼들을 데리고 화원의 사문진나루터로 걸어서 갔다.

사문진에 도착하니 나를 비롯해 20명의 짐꾼, 한글 선생 2명, 하인 1명, 그리고 자전거로 달려온 아담스 등 모두 25명이 됐다. 나룻배에서 내려진 피아노가 나루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짐꾼들은 피아노가 무엇에 쓰는 물건이지 매우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귀신통'이라며 짐꾼들 깜짝 놀라

짐꾼 중 한 사람이 피아노에 덮여진 포장을 살짝 걷은 후 아무 생각 없이 건반을 탁 내려치자 갑자기 '쾅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소리에 짐꾼들은 놀라서 후다닥 뒤로 물러나는 우스꽝스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피아노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짐꾼들은 이상한 소리를 낸다며 '귀신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가 8전(엽전)으로 짚단을 구해주자 짐꾼들은 새끼줄을 꼬았다. 두께 5cm, 길이 15m의 밧줄 3개를 만들었다. 대구에서 가져온 4.2m의 길이의 상여용 막대 2개를 사용해 피아노를 운반할 도구를 완성했다. 이 작업으로 첫날 하루를 다 보내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짐꾼 4명을 더 고용했으나 3명이 돌아가 버렸다. 남은 짐꾼은 21명이었다. 존슨의사도 동참해줬다. 짐꾼들은 피아노를 상여를 둘러메듯 하고 대구로 출발했다. 피아노가 초가집 처마 끝에 부딪히기도 하고, 논길'산길'도랑'연못을 통과하면서 어렵게 지나갔다.

도중에 여인숙에서 식사를 주문해 오후 2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3시부터 다시 운반에 나섰다. 논을 지날 때는 짐꾼들의 발이 질퍽한 논에 빠지는 바람에 매우 더디게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짐꾼들은 지쳐갔다. 중간 중간 쉬는 시간이 처음에는 약 10분 정도였던 것이 20~40분씩이나 길어졌다. 또 일부 짐꾼들은 서로 자리 배치가 잘못됐다며 멱살잡이를 하는 바람에 점심 식사 후 고작 1.4㎞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짐꾼들이 더 이상 가기를 거부해 저녁식사를 빨리 마치고 하루를 접어야 했다. 사문진나루터에서 대구까지 약 16㎞ 가운데 3분의 2 정도를 지나왔다. 앞으로 대구까지는 대략 5㎞ 정도 남았다.

사문진나루터에서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짐꾼들이 힘들어하는 탓에 10명의 짐꾼을 더 데려와 31명으로 불어났다. 운반은 10명이 한 조로 3교대로 이뤄졌다. 가는 도중에 존슨 의사와 한글 선생이 서로 가는 방향을 놓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성경공부방에 자리 잡은 피아노

짐꾼들이 둘러멘 피아노는 우여곡절 끝에 대구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종로)까지 도착했다. 남문을 지나자 상인들이 펼쳐놓은 가판들로 통로가 빽빽하다. 짐꾼들은 가판대 물건들을 넘어뜨리기도 하면서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드디어 종로의 집 앞까지 피아노가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귀신통'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제 집안으로 옮기는 게 문제였다.

집 대문은 피아노보다 6㎝나 좁았고, 창문은 1.25㎝ 낮았다. 궁리 끝에 대문을 파내고 피아노를 집안으로 들여 놓을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는 거실로 옮겨졌다. 나는 짐꾼 21명에게 1인당 40센트씩 지불했다. 오늘 아침에 온 짐꾼 10명에게는 10센트씩을 건넸다. 모두들 굽실거리며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피아노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건반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겨우 하나밖에 없다. 이탈한 건반을 모두 맞춰 끼웠으나 2개는 부서진 상태다. 그렇지만 조율은 그런대로 잘 돼 연주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피아노는 아내 에피의 것이다. 에피는 대구 종로에서 성경공부방을 열고 어린이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칠 때 피아노를 쳤다. 에피는 처녀 때인 미시간주 래피어 장로교회에서도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할 정도의 재간둥이였다. 나와 에피는 1907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에도 아내 에피의 피아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에피는 교회와 동네에서 음악교실을 운영했다. 또 에피는 딸(마가렛 커티)에게도 피아노를 통해 전문 음악인으로 키웠다. 아내 에피의 피아노가 대한민국 피아노의 '효시'가 됐고, 사문진나루터는 대한민국 피아노의 '고향'이 된 것이다.

달성 김성우 기자 swkim@msnet.co.kr

도움말=한국음악문헌학회 손태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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