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직접 만들어본 북한식 김치…고춧가루·마늘·소금·설탕이 전부

배추 간도 남한보다 심심하게

북한 김치는 화려하지 않다. 고춧가루, 마늘, 멸치젓을 넣어 완성한 김치 양념.
북한 김치는 화려하지 않다. 고춧가루, 마늘, 멸치젓을 넣어 완성한 김치 양념.
운미 씨가 완성된 양념을 배추에 버무리고 있다.
운미 씨가 완성된 양념을 배추에 버무리고 있다.
북한 김치 드디어 완성! 재료는 남한산이지만,
북한 김치 드디어 완성! 재료는 남한산이지만, '레시피'는 함경북도 청진 방식을 철저하게 따랐다.

한식 요리에 끝판 대장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김치'일 것이다. 올 한 해 동안 빵 만들기(본지 2월 22일 자 11면 기사 참고), 닭갈비 만들기(10월 11일 자 10면 기사 참고)로 요리 실력을 쌓은 기자가 이번에는 김치에 도전했다. 김장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배추 포기를 생각하겠지만, 싱글족 형편에 맞춰 배추 두 포기로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그것도 그냥 김치가 아닌 '북한 김치'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온 '요리왕' 김운미(가명'28) 씨의 도움을 받아 북한 김치 만들기에 도전했다.

◆가까스로 구한 절임배추

김치를 담그기로 한 전날 오전, 운미 씨가 기자에게 연락했다. "수영 씨, 내일 김치 만들려면 오늘 배추를 미리 소금에 절여놔야 할 텐데. 준비할 수 있어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운미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절임배추가 있잖아요! 서문시장에 가면 안 파는 거 없어요." 모든 재료는 당일 서문시장에서 수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시장에서 만났다. 비록 배추 두 포기만 담그는 싱글족의 소박한 김장이지만 맛있는 북한 김치를 만들어 신문사 사람들에게 자랑하겠다는 열의가 불타올랐다.

북한 김치는 화려하지 않다.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 재료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멸치젓과 마늘, 고춧가루, 간을 맞출 설탕과 소금이 전부다. 운미 씨가 자신의 고향인 청진 김치의 특징을 설명했다. "북한도 지역마다 김치가 달라요. 양강도 지역은 갓김치를 많이 먹고, 바닷가가 가까운 청진은 해산물을 넣은 김치를 담가요. 아, 돼지고기를 넣는 집도 있어요. 아주 잘사는 집은 명태랑 오징어도 넣고. 여기서는 오징어 내장을 다 버리지요? 시커먼 오징어 내장을 넣는 집도 있는데 진짜 맛있어요. 그리고 북한 김치에는 젓갈도 많이 안 넣어요. 북한에 살 때 액젓을 본 적이 없어요." 서문시장 젓갈 코너로 가자 상인들은 "김치에는 액젓을 넣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운미 씨는 멸치의 형체가 보이는 일반 젓갈을 골랐다.

다음 품목은 절임배추. 가장 확실한 정보원은 시장 상인이다. 고춧가루 반 근을 사며 절임배추를 살 수 있는 곳을 물었다. "절임배추? 지금 와서 찾으면 사기 어려운데. 미리 주문해야 해. 가만 보자. 저 앞집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물어봐 줄게." 미리 주문해야 한다고? 배추를 미리 절여야 한다는 운미 씨의 권유를 무시하고 절임배추를 사자고 큰소리친 사람이 나였다. 이내 돌아온 양곡점 사장님은 "저 집에 없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절임배추가 없으면 이번 기사를 쓸 수 없다. 이번엔 마늘을 사러 간 김에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기 건너편에 새로 생긴 반찬가게 있지? 거기서 본 것 같아. 한 번 가봐." 운미 씨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말씀하신 가게로 바로 뛰어갔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절임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문 수량을 맞춰야 해서 절임배추를 팔 수 없다는 주인을 간곡히 설득해 6천원을 주고 네 등분이 난 배추 한 포기를 샀다. 두 포기로 김장을 하겠다는 목표는 이렇게 수정됐다.

◆"김장할 때 식구 수대로 한 독씩 담가요"

세상에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장 재료를 사러 시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이제 기자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본격적으로 김치를 만들 시간이다. 운미 씨는 절임배추를 먹어보더니 "간이 짜다"며 대야에 물을 받아 배추를 담갔다. 배추의 소금기가 빠질 동안 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잠깐, 운미 씨. 찹쌀풀은 안 넣어요?" 김치는 못 만들어도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찹쌀풀은 김치를 빨리 익게 만든다. 운미 씨는 "청진 김치에는 찹쌀풀은 안 넣는다. 대신 물을 끓인 뒤 고춧가루를 풀어서 양념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김치를 만들고 있으니 자연스레 말문이 터졌다. 김장의 장점이란 이런 것이다. 열세 살 때부터 김치를 담갔다는 운미 씨가 고향 청진의 김장철 모습을 묘사했다. "날씨가 더 추운 양강도는 10월, 청진은 11월 초에 김장을 해요. 김장철은 동네 잔칫날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이렇게 수다 떨면서 김장하고, 써래기 김치(배추와 무를 잘라 만든 김치), 깍두기도 만들고요."

청진 사람들은 김치를 식구 수대로 한 독씩 담근다. '1인 1독' 김장 체제다. 한 번 김장에 4, 5일씩 걸리는 것도 엄청난 김치 분량 탓이다. 그 이유를 묻자 운미 씨는 "북한에는 밑반찬이 별로 없다. 깍두기, 콩나물, 김치가 전부다. 한 끼에 다섯 식구가 배추 큰 포기 하나를 다 먹었다"고 말했다. "북한에는 김치 냉장고 없어요?" 질문을 해놓고도 참 무식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미 씨는 "에이~ 없지요. 평양에는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라며 깔깔 웃었다.

큰 축제인 김장철에는 학교에서 조퇴 허가를 내주기도 한다. "김장철이 되면 학교에서 시간을 다 빼줘요. '김장인데 조퇴하겠습니다' 하면 선생님이 집에 가라고 보내주고. 아버지들도 큰 독을 씻어야 하니까 직장에 이야기하면 시간을 빼줘요."

◆북한 김치, 남한 김치, 큰 차이 있나요?

수다를 떠는 사이 김치가 점점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배추 이파리를 뜯어 먹어보니 소금기가 적당히 빠졌다. 운미 씨는 노련한 손놀림으로 고춧가루와 뜨거운 물, 멸치젓을 넣어 잘 섞었다. 기자는 옆에서 엉성한 칼 놀림으로 마늘을 잘게 다졌다. "북한에서는 김치가 빨리 시지 말라고 생강을 넣는 집이 있긴 하지만 청진에서 생강은 열 집에 한 집 넣을까 말까예요." 간이 잘된 양념을 배추에 버무리자 순식간에 김치가 완성됐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맛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김치를 양념 맛이 아니라 김치 맛으로 먹는다"는 운미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신문사로 김치 한 쪽을 가져와 북한 김치 시식회를 열었다. 미리 말하지 않으니 북한 김치란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고, "김치 양념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멸치뼈가 씹히는 느낌이 싫지 않다. 맛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남한 김치와 북한 김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 미국에는 갈등과 편견을 요리하는 '컨플릭트 키친'(Conflict Kitchen)이 있다. 이 식당은 북한, 아프가니스탄, 쿠바, 이란, 베네수엘라의 음식을 판다. 미국과 갈등이 많은 나라, 핵과 전쟁을 주로 떠올리는 나라의 음식을 팔면서 다른 문화를 나누고 있다. 이렇게 음식은 편견을 넘어서는 도구가 된다. 배추 한 포기로 한 소박한 김장이 의미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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