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글픈 서민 역주행 대한민국] 3.서민 을의직종 '헐'

"짤리고 싶어?" 욕먹고도 "고객님, 사랑합니다…" 미소 뒤에 감춰진 고통

대표적인 감정종사자이자 하늘 위에서 항상
대표적인 감정종사자이자 하늘 위에서 항상 '을'의 자세로 봉사해야 하는 승무원. 이 직업을 희망하는 지망생들이 친절 연습을 하고 있다.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대한민국 '을'들이 위험하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백화점 VIP 갑질 모녀' 사건과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등에서 보여지듯 감정노동자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갑질 고객'에게 피해를 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높은 고객만족도 유지의 그늘에 가려져 가슴앓이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감정노동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법적 보호망과 기업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고객 앞에 늘 고개 숙인 감정노동자

처음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스무 살에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처음 서비스업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박규리(가명'26) 씨는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유 불문이었다. 고객이 다른 곳에서 샀는 빵을 가져와 상했다고 화를 내도 박 씨는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했다. 고객이 욕설을 퍼부었을 때도 사과는 늘 그의 몫이었다. 서러웠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밖에 내뱉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다음 달에 내야 할 월세가 눈앞에 아른거려,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고객 앞에 고개를 숙였다. 박 씨는 "직무교육을 받을 때부터 사장은 직원 잘못이 아니더라도 고객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교육시킨다"고 털어놨다.

최악은 홈쇼핑 콜센터 텔레마케터였다. 하루 9시간 동안 200통이라는 주어진 통화량을 채워야 했다. 업무량을 소화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지만 정작 박 씨를 힘들게 하는 건, 육체적인 고달픔보다 고객과 회사에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욕설을 내뱉거나 성희롱을 하는 건 차라리 낫다. 이럴 경우 고객대응 매뉴얼에 따라 전화를 끊어버리면 된다. 진짜 골칫거리는 무리하게 반품을 요구하는 등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진상 고객'이다. 억지임이 분명했지만, 회사에서는 박 씨에게 '예스맨'이 될 것을 요구했다. 진상고객은 한 번, 두 번 요구를 들어주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블랙리스트 손님을 표시하는 빨간불이 전화기에 켜지면 심장이 벌렁거려요. 나중에는 사람이 무서워졌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그만뒀죠."

안전보건공단이 2013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국내 전체 취업자 2천500만 명 중 552만 명이 서비스업'판매업 등에 일하는 감정노동자다. 5명 중 1명은 박 씨와 같은 신세인 셈이다. 위 보고서에서 감정노동자 2천6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대부분 감정노동자는 고객으로부터 폭언과 인격 무시, 성희롱 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 인한 정신질환도 심각하다. 응답자의 58.3%가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8%는 자살을 실제 시도하거나 생각한 적 있다고 답했다.

◆직원 만족은 뒷전, 고객 만족이 최우선인 회사

기업은 진상 고객으로부터 감정노동자를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고객과 충돌이 있을 때면 해당 종업원에게 시말서 작성, 공개사과 등을 요구하며 고객 감싸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암행감찰이나 CCTV, 녹음 등을 통해 고객과의 충돌사항을 관찰한 뒤, 직원평가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들 감정노동자에게 '절대 갑'은 사실상 진상고객이 아니다.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업주인 셈이다.

국내 항공사에 근무하는 한 승무원은 얼마 전 비행을 하면서 모든 신경을 한 고객에게만 쏟아야 했다. 비즈니스석에 탑승했던 이 고객은 이륙 전에 승무원이 자신의 짐을 빨리 들어주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이 사건은 사무장이 그 고객에게 사과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 승무원은 비행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 고객이 불편사항을 사내 홈페이지에 게시할까 봐 두려워서다. 고객의 불편사항은 해당 승무원의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그는 "고객이 승무원 머리가 기름지다. 승무원이 말을 걸어서 게임에서 졌다 등의 항의글을 게시판에 올린 적도 있다"며 "지금 구조로는 고객의 어떠한 요구에도 승무원이 명확하게 거부권을 행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고객과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응방안이 마련된 곳도 있지만, 지켜지기란 쉽지 않다. 매뉴얼을 따를 경우 자칫 회사에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으로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안내데스크에서 2년간 일했던 한 여성은 "성희롱을 당한 후에 이를 언급했더니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고 회사에서 눈치를 줬다"며 "불이익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속앓이를 하는 편이 낫다"고 고백했다.

실제 노동건강환경연구소가 2013년 조사한 '감정노동종사자 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감정노동자들은 '사업주에게 말해봤자 별 대책을 세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82.7%), '불이익을 줄 것 같아서'(7.8%) 등의 이유로 고객으로부터의 피해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지역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만족도는 매장 수입과 직결되는 요소"라며 "종업원에게 과도한 친절을 요구하는 것은 서비스 업계에서는 불편한 현실"이라고 밝혔다.

기획취재팀 권성훈 기자 cdrom@msnet.co.kr

신선화 기자 freshgirl@msnet.co.kr

※'감정노동자'=직업상 고객을 대할 때,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회사에서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을 보여줘야 하는 고객응대 업무를 말한다. 콜센터, 판매직 등 서비스업종 종사자가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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