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승(61) 인사동주민발전협의회 회장은 투자의 귀재다.
울진 죽변의 고향에서 상업고를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무작정 상경했다. 그에게서 먹고사는 문제는 처음부터 별문제가 아니었다. 특유의 자신감이 넘쳤다. 김 회장은 "서울에 가면 무조건 직장이 있고, 먹을 게 있고, 돈이 있고, 살 만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고향을 떠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험한 일을 하지 않고, 서울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첫 직장생활부터 돈을 만지는 경리업무를 봤다. 돈을 빌리고 어음을 막고 월급을 주고 다시 돈을 빌리고 갚고를 반복하면서 돈 무서운 줄 모르면서 돈을 만졌다. 서울 생활 수년 만에 돈이 돈을 낳는 자본주의 구조를 재빠르게 체득했다. 돈을 눈덩이처럼 불리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컨설팅 회사를 직접 차렸고, 그 방식은 적중했다. 채권단 대표로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면서 그의 자산 증식은 절정기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경제성장 증폭기의 지하자금 활성화도 그의 돈벌이에 가속도를 붙였다. 끝없이 고공행진을 하던 그의 자산 증식은 결국 무리한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제동이 걸렸다. 수백억원의 자산을 한순간에 날렸다. 하지만 좌절은 없었다. 다시 오퍼상(무역대리업)으로 돈을 모았고,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먹고살 만큼' 재기했다. 현재 인사동에서 건물 리모델링,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다. 인사동 공예품 가게를 비롯해 춘천아트센터, 대구 섬유업체 등 다각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 그에게서 '돈 버는 비결'을 들어봤다.
-왜 고향을 떠났나.
▶한국전쟁 이후 무역항인 울진 죽변은 개화된 지역으로, 인구가 7천 명 정도였다. 아버지가 소령 출신으로 예비군 부연대장이었고, 배도 있고, 부자였다. 죽변에서 초'중'고를 졸업했다. 고교 때는 학생회장도 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고향에서 군 제대 뒤 직장을 잡기 위해 서울로 나왔다. 상업고를 졸업하면서 어딜 가든 내가 먹고살 것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먹을 것과 잠잘 곳이 당장은 없었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상경한 뒤 어떤 일을 배웠나.
▶당시 우수한 경리를 뽑아 업체에 소개해주는 대한세무협회를 통해 업체에 들어갔다. 처음엔 구로공단 내 소규모 금속제조업체 총무과에 입사했다. 1년 6개월쯤 있다 다시 명동의 중견 섬유수출업체로 옮겼다. 직원이 3만 명가량 되는 큰 회사였는데, 처음엔 구매부서에 2년 있다가 자금부서로 옮겼다. 경리과에서 자금업무를 담당하면서 돈이 돌아가는 구조를 익히게 됐다.
당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 어느 회사든 자금 유동성이 좋지 않았다. 경리과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은행으로부터 수출자금 등을 빌려서 근로자의 월급을 주고 자금을 관리해 회사가 부도나지 않게 막는 일이었다.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한계에 부닥치면서 결국 돈이 있는 곳을 찾았다. 여기에는 경리담당인 나를 포함해 부장, 상무, 이사 등이 모두 나섰다.
현금 여력이 있는 곳이라면 종친회, 화수회, 사학재단, 대만인 신용조합 등을 가리지 않았다. 어음이나 당좌를 맡기고 돈을 빌려와 어음 결제를 하고, 월급 주고, 원자재 구입비를 충당하면서 회사 전체의 자금 흐름과 돈이 돌아가는 방식을 익히게 됐다.
-어떻게 돈을 벌었나.
▶어음을 가져가 사채를 빌려오는 과정에서 월 이자율이 상무는 4부, 부장은 3부 5리, 나는 3부 2리, 이런 식으로 제각기 달랐다. 대리인 내가 업무를 맡고 돈도 잘 빌려오다 보니 평균 이자율 결정에 전권을 갖게 됐다. 사채 이자율을 3부로 결정해놓은 뒤 내가 2부 5리로 빌려도 그렇게 빌렸다고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3부 5리나 4부에 빌리기도 하고, 2부 5리에 빌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금조달 경력이 쌓이면서 거래처도 점점 넓어졌다. 신용금고회사에도 돈을 빌렸는데, 여긴 기업 규모와 신용도에 따라 차이가 났지만 다른 데보다 이자율이 훨씬 낮았다. 내 집을 담보로 맡기는 방식으로 신용도를 높였고, 훨씬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자금 담당을 오래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어음과 가계수표를 맡겼다. 현금을 불려달라고 맡기는 사람도 이어졌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졌는데 회사 일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았다. 결국 어음 전문 할인업체를 차렸다. 80년대 중반 돈을 빌려준 곳 가운데 직원 400명가량인 삼성물산 협력업체가 부도나면서 채권단 대표로 이 업체를 인수했다. 인수한 섬유업체와 컨설팅회사를 운영하면서 지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원대의 돈을 모았다. 절정기였다. 하지만 공동 투자한 경기 안성여객이 부도나면서 타격을 입었다. 주식과 부동산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가 망한 뒤 섬유 오퍼상을 하면서 재기했다. 10년가량 오퍼상으로 돈을 모은 뒤 인사동으로 진출했다.
-돈 버는 비결이 있나.
▶재화를 재창출하는 것이 자금의 원리다. 고정성과 유동성 자산을 눈여겨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돈을 버는 규모의 게임이다. 한두 푼 절약해서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경제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규모의 게임에서 항상 앞서가야 한다.
30여 년 전 '김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식변동사항을 두루마리 종이에 막대그래프를 그렸다. 200개 주요 기업의 그래프를 배낭에 메고 다니면서, "내가 주식투자로 집 5채 날리면서 노하우를 쌓았다. 나를 믿고 투자해라. 대신 오르면 50%를 달라"며 전국을 다녔고, 이 그래프를 믿고 투자했던 아줌마 부대들도 있었다. 아파트 건설 활황기에는 돈 한 푼 없이 은행 융자와 선분양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던 때도 있었다. 이처럼 시대상황에 맞게 돈을 투자해 버는 방식이 따로 있다. 시기별로 자본주의 구조변화를 잘 읽어야 한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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