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형식도 중요
화술은 기술이 아니고 예술
정치인 말은 특히 진정성 있어야
운명과 심성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 같은 것이라는 시구를 헤르만 헤세가 좋아했다는데, 언행(言行)도 그렇다. 심성과 운명으로 사람의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기에 성격이 운명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보통은 상대방이 말을 하면 듣는다고 하는데, 나는 좀 다르다.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그 말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50년 가까이 말과 목소리로 일해온 직업 본능이랄까. 라디오 드라마나 외화 배역의 성격과 심리를 섬세하게 분석하던 습관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10여 분쯤 말을 나누어 보면 상대방의 성격, 지적 수준, 또는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삶의 생각 같은 몇몇 특징이 스케치 된다. 말할 때의 표정, 몸짓, 어휘 선택 외에도 말의 조리성, 배려심 등에서 앞서 지적한 점들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짐작과 다른 경우도 있어 함부로 속단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궁금한 경우에나 분석(?)하지,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도 아니다.
화술강의를 많이 하는데, 스터디하는 분들이 자신의 목소리, 말투, 고향 말의 억양이 어떤지와 내용에 대한 코칭을 받고 싶어 한다. 장'단점을 말해줄 때는 두루뭉술해선 도움이 되지 않기에 정확한 지적을 해준다. 즉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어떻게 그림(해석) 그릴지도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요즘은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형식도 중요해졌다. 그래서인지 정치인이나 CEO들이 개인 레슨을 청하는데 선거를 앞두거나 TV출연이 있을 땐 더 바쁘다. 다른 공부는 많이(?) 했겠지만 화술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화술은 기술이 아니고 예술이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반드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던 선거 TV토론에서 몇 가지 빅 데이터를 찾을 수 있는데, 독한 싸움닭(?) 같은 후보는 대부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래전 서울시장 선거 때였다. K후보는 젊음의 패기와 화려한 스펙으로 미래의 정치인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상대후보는 경륜은 많았으나 나이도 많고 달변도 아니었다. 토론이 시작되자 K후보는 야심 찬 비전을 제시했고 스피치도 논리 정연했다. 그러나 상대후보에 대해 말할 때는 비웃는 표정은 그럴 수 있다 해도 적개심에 가득 찬 얼굴로 목소리 톤까지 높이며 공격했다. 신선한 도전처럼 시작이 좋았는데 어딘가 무례하고 거친 투사로 변신한 것 같았다. 당선자는 여유 있는 매너로 K후보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상대후보였다.
역시 오래전 대권주자 중 한 분이었던 정치인은 언변이 청산유수였다. 쇼맨십도 좋아 광고모델도 했는데 무균(無菌)의 이미지로 여론도 괜찮았다. 그러나 처신과 말의 진정성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더니 탈락했다. 진정성 있는 말 한마디로 모호한 판세를 기막히게 역전시킨 주인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장인어른의 과거 사상 전력을 문제 삼자 "그럼 마누라를 바꾸란 말입니까?" 했던 것 말이다.
모 후보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하며 차세대 리더로 각광받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미디어의 파워가 확장된 환경도 그 후보에게는 프리미엄급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TV 토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상대후보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다. 더구나 비판이 정당하면 상대후보는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을 수도 있다. 문제는 비판의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말씨나 말투도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후보는 상대를 적으로(?) 몰아 버리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는데 결과는 2등이었다. 냉혹하게 느껴지는 화술 화법과 표정 속에 국가리더로서의 이미지는 존재할 공간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물론 승패의 요인은 복잡 다양하다. 유권자들도 TV토론만으로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여하튼 일부 정치인들의 저질 막가파적인 막말을 듣고 보노라면 이런 말들이 생각난다. 설저유부(舌底有斧) 즉 혀 밑에 도끼가 있다고 했다. 하긴 남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부터 조심해야 할 일이기에 말이다.
성우·서울예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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