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바쳐 나라 지킨 젊은 의기 기리고
유공자 끝까지 찾아내 명예 보존해야
역사 전환의 분수령을 이룬 대규모의 전쟁에는 다양한 작전이 구사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 마련이었다. 양동작전도 그렇다. 양동작전이란 아군이 노리는 작전지역으로부터 적의 관심과 행동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위장술이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펼친 기만전술이었던 장사상륙작전도 양동작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된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키기 위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새벽,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상륙작전용 함정(LST) 문산호가 나타났다. 10대의 학도의용군 772명을 태운 LST가 이곳에 등장한 것은 인민군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극비 작전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태풍으로 배는 좌초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파도에 휩쓸리며 인민군 총탄에 쓰러졌다. 학도병들은 악전고투 끝에 장사해변을 장악하고 고지를 점령했지만, 통신 두절과 식량 부족으로 탈진한 상태에서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일에야 LST 조치원호가 도착해 철수를 했지만, 30여 명의 병사들은 태우지도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이 작전으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다.
그 후 장사상륙작전은 잊힌 작전이 됐다. 1980년에야 참전 학도병들이 대구에서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를 결성하고 모금 운동을 펼쳐 장사리 해안에 위령탑과 전적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상륙작전의 역사적 조명과 함께 실물 모형으로 복원 건조한 문산호가 장사리에 귀환하고, 전승기념공원이 준공을 앞두기까지 꼬박 65년의 세월이 걸렸다.
생존한 30여 명의 학도의용군 동지들은 지금도 모래톱에 묻힌 어린 충혼들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여 년이 지나서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어느 80대 노병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18세의 나이로 전쟁터에 나갔지만, 나라를 위한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학도병들도 그랬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하고, 얼마 남지 않았을 생존 유공자를 찾아 뒤늦게라도 그 공을 인정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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