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즐거움 갖길
대상 당선소감 -박필선
들깨를 심어놓고 남편의 산소를 바라보며 '비 좀 오게 해보세요' 했는데, 다행히 비가 내려 모종이 잘 정착되었습니다.
장마의 초입에서 빗줄기가 내려 농사에는 많은 보탬이 된 셈입니다.
농촌은 예전만큼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대규모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갑니다.
농기계의 발전이 사람의 일을 많이 덜어준 것인데, 좋은 농기계를 볼 때마다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40~50년전에도 이런 기계가 있었더라면 골병이 들 정도의 노동은 안 해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아쉬움이 많아집니다.
남편과 아이들까지 북적거리던 넓은 집은 조용합니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올 때는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지만, 일상은 항상 저 혼자서 지내는 집입니다.
그러나 혼자라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습니다.
남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다가 수시로 걸려오는 아이들의 전화 덕분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관심과 소통도 외롭다는 생각을 없애주는 좋은 치료제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공기가 선선한 아침저녁으로는 밭으로 가는 체력도 갖고 있습니다.
큰 병 없이 살아온 시간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움직일 수 있어 아이들과 나눠 먹을 수 있는 소소한 농사짓기도 감사합니다.
저의 조금은 소홀한 손길에도 잘 자라주는 농작물도 예쁘기만 합니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삶이었지만, 결론은 '살아있음의 행복'이니, 더 많이 감사합니다.
자잘한 행복과 슬픔의 이야기였지만, 크고 소중하게 다뤄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아있는 날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이 더 많기를 기대해봅니다.
◆대상작: 담배 生, 담배 別 / 박필선
1. 남편의 흔적 앞에서
사촌 시동생 내외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일흔의 나이가 되고 보니 팍팍한 서울살이보다는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아서란다.
"형님께 먼저 인사를 여쭈어야겠어요."
사촌 시동생과 함께 남편의 산소를 향하는 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유일하게 남아있게 된 밭을 지나가게 되었다.
"형님이 이 밭에 참 애착이 많았지요. 보림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처음으로 산 밭이었거든요. 여기에 들깨를 심어 애들과 나눠 먹겠다고 차가 들어올 수 있게 길도 닦았는데…."
그 밭은 남편과 내가 火田을 일구어 지은 담배 농사 수익으로 처음 산 우리 토지였다.
그래서 남편은 그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자신의 묘지도 밭과 접해있는 산등성이에 써줄 것을 미리 부탁할 정도였다.
남들은 그것을 '죽은 뒤에도 밭에 일하러 오는 마누라 얼굴을 보려고 산소 자리를 그곳에 잡았다'고 했지만, 50년을 함께 살아온 내가 볼 때는 밭에 대한 애착으로 보였다.
뭐, 어떤가?
어떤 이유로든 남편은 내가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저승의 집터를 장만했고, 이승의 나는 그 밭을 보면서 살 수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노후에 해당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 되니 말이다.
남편의 산소에 도착하자 시동생이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제기 위에 얹었다.
"형님! 담배 한 대 피우세요. 형님은 담배로 사셨는데 그곳에도 담배가 있나요?"
그랬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 나의 인생은 담배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나를 갈라놓은 것도 결국은 담배였는데, 남편은 담배 때문에 일흔의 초입에서 생을 마감해버렸다.
그러므로 담배는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가족에게는 은인이 되지만, 남편의 죽음과 연관지으면 최대의 방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담배란 존재는 내게 있어서는 양면성을 가진 칼날인 셈이다.
2. 뒤집어진 이십대의 새 출발
스물의 막바지였다.
내 나이 스물의 정월에 결혼을 했고 스물의 동짓달에 첫 딸을 낳았다.
하지만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던 남편은 첫 딸을 보았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한 암담함이 남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 조리는 꿈도 꾸지 못했다.
미역국을 먹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종갓집의 바로 아래 큰집이었던 시댁이었기에 장손이었던 남편에게 아들이 아닌 딸은 장손으로서의 도리에도 맞지 않는 첫 아이였다.
시어머님은 노골적으로 '아들이 아닌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셨고, 시아버지는 돌아앉아 곰방대에 풍년초를 밀어넣고 계셨다.
시집을 가지 않은 손아래의 두 시누이도 아들이 아니어서인지 아무런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무뚝뚝한 남편만이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된다'고 했지만, 자식의 성별을 골라서 낳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편은 나를 60리 떨어진 친정으로 보내주었다.
집에서는 산후조리를 못 할 것이니 삼칠일이 될 때까지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라는 거였다.
친정은 郡內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으니, 어쩌면 쌀밥과 미역국을 듬뿍 먹어라는 의미가 더 강했을 거였다.
하긴 남편도, 아니 시댁도 나와 결혼 말이 오갈 때는 이렇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논밭이 많았고 부자들이 사는 기와집이 두 채나 있었다.
친정집의 가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부자에 속했기에 혼삿말이 나왔고, 우리는 약혼을 했다.
약혼 후에 남편은 軍에서 배운 운전기술로 버스 운전을 했다.
요즘에야 버스를 운전한다고 하면 시답잖게 생각도 한다지만, 당시에는 고급 직업이었다.
보수도 좋았고, 사회적 인식도 좋았다.
하지만 그 일이 남편과 나, 아니 우리 모두의 삶을 뒤바뀌게 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남편이 버스를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사람이 죽었다.
요즘은 자동차 보험이라는 것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사고를 낸 사람이 모든 보상을 해야 하는 거였다.
결국 시아버지께서는 논밭과 집을 모두 팔아 남편의 사고를 수습하셨고, 시댁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기와집을 팔고 남의 집 곁방살이로 오두막살이를 시작하셔야 했지만, 남편이 처벌을 받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두 칸의 방에서 남편과 두 여동생인 시누이와 시동생, 시부모님이 함께 살아야 하는 거였다.
남편과 시동생, 시아버님이 같은 방을 쓰고, 또 다른 방은 시어머니와 두 시누이가 썼다.
남편은 운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이상 운전대를 잡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운전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사고 후 반년이 지난 때가 우리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남편은 기죽은 표정이 되어 당시의 풍습대로 처가로 와서 사모관대를 입고, 나와 혼례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이라는 말이 막 퍼질 즈음이었지만, 우리는 그냥 친정에서 하룻밤만 지내고 시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혼부부가 살 방은 없었다.
시어머님은 나와 약혼식을 치른 후에 일어난 남편의 교통사고를 언급하며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왔다'며 돌아앉으셨는데, 그게 어떻게 내 탓인가 싶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시어머님께서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셨다.
남편은 남자들 방에, 나는 여자들 방에 따로 자는 생활을 하는데도 '신혼부부이니까' 하는 배려는 아예 없었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식사시간이었다.
보리쌀도 귀했던 시절이라 풀이 더 많이 들어간 국을 끓이면 보리쌀은 드문드문 있는데, 그 국물조차도 나는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시어머님은 식사때가 되면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내게 "오늘은 뭘 먹냐?"며 물어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시어머님의 연세는 마흔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찌감치 늙은 시어머니 흉내를 내시면서 며느리 기잡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셈이었다.
부잣집 막내딸로 자라, 급작스럽게 가세가 기운 집의 맏며느리 자리는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우물에서 떠온 물로 배를 채우는 법을 터득했고, 시어머님의 냉소 섞인 잔소리에도 꾹꾹 견디는 참을성을 키워야 했다.
시어머님은 잘사는 집의 마나님에서 남의 집 곁방살이로 떨어진 생활에 대한 화풀이를 하시느라 그랬는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짜증을 표출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품일을 다니는 거였다.
친정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 집에서 품을 팔았는데, 이곳에는 내가 품일을 하러 다녀야 했으니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에 품을 판다는 쓰라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힘들었다.
나중에야 나의 그런 마음이 속 좁은 자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일이 내가 살아가는 데는 많은 보탬을 주었으니 생각해보면 앞으로 잘 살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시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자기 농토를 가지고 일꾼을 부르는 주인보다는, 자기 토지 없이 남의 품일을 다니는 사람이 더 잘 사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여자들도 사흘만 일하면 쌀을 한 가마니(80㎏)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때는 일 년을 일하면 쌀이 두 가마일 만큼 품삯이 쌌으니, 품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먹고사는 일이 정말 힘든 세월이었다.
남편도 남의 품일을 열심히 다녔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는 힘겨운 살림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첫 아이를 가졌고, 출산을 했다.
첫딸은 왜소한 체격이었다.
친정어머니는 아이의 덩치가 작은 것이 엄마가 먹는 것이 부실해서 그런 거라며 울먹거리셨다.
요즘에야 친정이 부자이면 남자도 처갓집 덕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아니 일부러 부자 처가를 구해 결혼을 할 정도라는데, 당시에는 '처가 덕을 보는 것은 사람도 아니다'거나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 신세는 안 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처가 덕을 보는 사람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때였다.
또한 남편의 성격도 처가 덕을 보는 것을 싫어했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정 출입을 한 번도 못해보기도 했다.
친정에서 보름 동안의 산후조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분가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도 남의 행랑채에 얹혀살고 있는데 무슨 집이 있어서 분가를 하는가 했더니, 골짜기로 들어간다는 거였다.
그때 우리가 살았던 시댁 마을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미 전기가 들어와 있는, 그러니까 면 소재지로서도 문명의 발전이 빠른 곳이었는데, 우리가 이사를 갈 골짜기는 1980년도에 겨우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산골짜기였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짜기에 가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냐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어머니가 임자한테 매일 성질을 부리고 당신은 힘들고. 그 힘든 걸 견뎌서 살 만해지면 그래도 살아보겠는데 매일매일이 그 생활이고. 동생들 셋도 혼사를 치러야 하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도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곳에 가면 祭貢집이 있어. 그 집에 살면서 일 년에 한 번 제사만 지내주면 문중의 산을 마음대로 개간해도 된다고 하네. 이미 개간된 밭도 있고, 논도 1,000평을 붙여도 되고."
어떻게든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火田을 장려했던 시기라 우리의 노력에 따라 밭은 얼마든지 넓힐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거기에다가 논 1,000평과 어머님의 신경질을 받지 않아도 된다 싶고 친정과 10㎞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고 하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갑자기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기대가 되었다.
보름간 분가 준비를 하는 동안 시어머님께서는 '맏이가 무슨 분가를?' 하면서 화를 내셨지만, 시아버지께서는 '살려면 할 수 없재' 하면서 체념하신 듯했다.
다행히 남편과 일곱 살 차이가 났던 시동생이 '아지매! 여기서 남의 집 품일 해서는 못 먹고 삽니더. 가서 넓은 토지 부쳐 먹는 것이 훨씬 좋아요' 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이삿짐은 단출했다.
남편과 나의 옷가지와 냄비 두 개에 수저 두 세트, 그릇 약간에 물동이 한 개와 이불이 다였다.
제공집에는 항아리도 있고 부엌에 무쇠솥도 두 개씩이나 걸려 있다니 큰 짐은 싸지 않아도 되었다.
시동생이 자전거 뒤에 박스를 싣고 딸아이를 담아 함께 움직였다.
우리가 살 곳에서 6㎞ 떨어진 마을까지만 버스가 운행되었기에 15리 길은 부엌살림을 챙긴 보따리를 이고 걸어서 갔다.
짐을 내려놓고 10㎞를 걸어 친정에 가서 '보림으로 이사했어요' 하며 인사를 했더니, 친정어머니가 싱거미싱 한 대와 쌀 한 말에 좁쌀 2되를 내 주셨다.
미싱은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니까 꼭 필요하다는 말씀이셨고, 양식은 3월이라 가을에 나락을 거둘 때까지는 양식을 주신다며 우선 이걸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의외로 남편이 선선하게 그것을 지게에 실었다.
받은 쌀과 좁쌀을 지고 집으로 오면서 남편이 말했다.
"딱 올가을까지만 장모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받겠다"고.
남편은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했지만, 일단은 살아야 했기에 말없이 받은 거였다.
후일에 이 얘기를 자식들에게 했더니 아이들은 "무슨 자존심을 그럴 때 발휘하시고"라고 했지만, 남편의 성정을 아는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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