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원폭 투하의 결과적 정당성

태평양전쟁 때 일본 해군은 1943년에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42년 2월에 이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원자폭탄 투하 비판자들은 이처럼 일본의 패배가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원폭을 투하한 것은 불필요하고 잔인한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이 퍼뜨려온 '일본인은 희생자'란 허위의식의 정서적 토양이 바로 이것이다.

비판자들의 주장대로 원폭이 아니라도 일본의 패배는 불가피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가 미국 잠수함의 일본 상선 격침이다. 태평양전쟁 동안 미국 해군은 총 800만t(2천117척)의 일본 상선을 격침했는데 이 중 60%(525만t)가 잠수함대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 상선의 손실은 1943년부터 크게 늘어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미군 잠수함이 공격 목표물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일본 상선은 씨가 말랐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대기근이 찾아왔고 산업은 붕괴했다. 미국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잠수함대로 일본 연안을 계속 봉쇄했다면 원폭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 몰려도 일본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 증거가 1945년 6월 6일 천황의 자문 기구인 추밀원이 승인한 '전쟁 수행에 있어 이후 따라야 할 기본 방침'이란 문서로,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전쟁을 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1만 대의 자폭용 항공기, 병사 235만 명, 군속 민간인 400만 명, 민병대원 2천800만 명이 총이 모자라면 죽창을 들고 결사 항전한다는 계획이 마련됐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침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연합국의 추산에 따르면 연합군 사상자는 100만 명, 일본인은 사망자만 1천만~2천만 명에 이른다. 원폭 희생자 수(히로시마 9만~16만6천여 명, 나가사키 8만여 명)는 이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일본 NHK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49%가 원폭 투하에 대해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반면 피해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그보다 낮은 43%와 46%가 그런 반응을 보여 대조를 이뤘다. 원폭 투하는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일본 국민이 굶어 죽거나 연합군의 본토 침공에서 희생됐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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