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비의 文章

임선기 (1968~ )

비 온다

언제나 첫 비

가슴에서 오는 비는

언제나 첫 비다

새벽에 어둠에

대낮처럼 멀리 떨어지는 비

불 켜지 말고 들어야 하는 비

온다

이 시각 누가 비탈을 오르는가

비탈이 비탈이 되는 이 시각

다시 빗소리

혼자 아득한 곳 가고

세상의 모든 차양을 두드리면서도

단 하나의 차양을 위한 비

온다

사랑의 정의는 사랑에

오래 있어야 한다

(전문. 『꽃과 꽃이 흔들린다』. 문예중앙시선. 2012)

이 시인의 다른 시 「말 2」에서 시인은 "이 말은 봉지에 싸서 한 계절을 두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시인은 문득 떠오른 어떤 이미지나 말을 가슴 한쪽에 오래도록 세워놓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치 다 숙성되었다는 듯이 그 이미지나 말이 다른 시간의 문장 속으로 쑥 들어오는 것을 경험한다. '비탈이 비탈이 되는 시각', '세상의 모든 차양을 두드리면서도 단 하나의 차양을 위한'이라는 이미지와 문장도 이미 숙성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들이 비의 풍경 속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시인은 지금 사랑을 묻고 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불 켜지 말고 들어야 하는 빗소리'가 있음을 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빗속으로 혹 그 누군가가 올지 몰라 귀 기울이는 그 시간을 안다. 그것은 언제나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비이고 오직 나만을 위한 비다. 사랑은 사랑이다. 이 동어반복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많은 사랑이 사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움과 질투와 폭력이 사랑의 이름으로 치장된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의 정의는 사랑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그곳에도 비가 내리는지… 모든 소리를 끄고, 모든 논리를 접고 빗소리를 들어보자. 시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빗줄기 뒤에 '봉지에 싸서 둔' 비의 문장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 빗소리 혼자 아득한 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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