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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울타리 속의 그녀들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일본인 친구가 며칠 전 대구로 나를 만나러 와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근황을 물을 겸 최근엔 어떤 연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유곽(遊廓)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연찮게도 바로 얼마 전 같이 공부모임을 하고 있는 선생님 한 분이 대구 중구 도원동의 속칭 자갈마당으로 불리는 성매매 구역 폐쇄에 관한 얘기를 하신 게 떠올랐다. 대학 시절 짓궂은 남자 동기들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입에 올리던 자갈마당이라는 단어가 처음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알고 나서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윤락가 부지가 곧 있으면 모 아파트의 입성과 함께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얘기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곳이 100년도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유곽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어에서 온 말이듯 대구의 유곽 역사는 일제와 관계가 깊다. 일제강점기 대구의 일본인 유입이 증가한 것은 경부선 철도공사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러일전쟁을 위한 물자수송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부설된 경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되면서 1천여 명의 일본인 인부가 대구로 들어왔는데, 그들 대부분은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단신 부임의 형태였다.

당시의 일본인거류민단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들의 공식적인 사업안건으로 유곽 설치를 상정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수익성 문제 등으로 내분도 많았던 듯하다. 유곽 대상지로 신천 근처와 동산, 그리고 지금의 도원동 등 세 곳이 물망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도원동의 땅 2만3천여㎡(약 7천 평)를 3천원에 매입하면서 도원동의 윤락가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이곳은 시가지의 폐수가 모여드는 저지대였기 때문에 유곽지 조성을 위해서는 저습지 매립이 필수조건이었다고 한다. 이에 이와세 시즈카를 비롯한 일본인민단 측이 당시 대구관찰사 박중양에게 성벽 철거를 제안했고 이것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이때 나온 흙과 돌이 도원동 저습지 매립에 사용되었다.

당시 도원동은 야에가키쵸라는 동명으로 불렸는데 이 동명은 고사기(古事記)라는 일본신화에 처음 등장하는 명칭이다. 이 신화에는 거친 성품 때문에 신들이 사는 땅에서 추방당한 어느 남신이 등장한다. 이즈모라는 곳으로 내려온 남신은 마침 마을의 처녀들을 잡아먹으며 말썽을 부리던 머리와 꼬리가 8개 달린 뱀을 퇴치한다. 그 덕에 어여쁜 아내를 얻고, 여러 겹으로 에워싼 구름 울타리 속에서 아내와 함께 산다는 내용의 노래(와카)를 읊는다. 얼핏 아름다운 사연처럼 보이나 결국 남자를 위해 울타리 속에 가둬진 여자의 이야기인 셈인데, 이 사연 덕인지 일본의 윤락가 명칭에는 '야에가키'라는 명칭이 종종 붙었다. 야에가키쵸라는 일본식 명칭은 해방 이후 도원동이라는 명칭으로 개정되었지만, 아름다운 동네 이름 뒤에 가려진 울타리 속 여인들의 삶은 100년의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이어져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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