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은 국가대표 권투선수였다. 그녀는 7급 공무원 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자신과는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해 2차 응시를 그만두고 서울대 연구원으로 생활하면서 권투선수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생업은 연구원, 직업은 권투선수였던 셈이다. 박주영의 목표는 국가대표가 되어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올림픽 출전은 좌절되었고, 선발전이 있는 날 권투선수로도 은퇴하였다.
박주영의 도전은 영화 '링'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연은 박주영의 스승이자 지금은 작고한 박현성 코치다. 박현성은 아마추어 권투 대회가 제도권의 이해 관계 때문에 판정이 정확하지 않게 이뤄진다고 한다. 학교 복싱부가 학생들의 진학을 위해 협회와 뒷거래를 하기 때문에 소위 '체육관' 선수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 자주 내려진다는 것이다. 박현성 자신도 선수 시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나가는 대회마다 2위를 했다. 그는 결국 조직 폭력배가 되었고 분신자살까지 시도했다. '제도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합 후 박주영이 객관적인 채점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하자, "웃기지 마라. 그런 일 절대 안 벌어진다. 확실하게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권투와 인생의 다른 지점일 것이다. 링 위에서는 '확실히 이기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링 밖에서는 '확실히 이기는 상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체육관 소속 선수는 판정에서는 지더라도 링 위에서 KO승의 기회가 있지만, 홍대파가 아닌 화가, 중대파가 아닌 사진가, 대학 소속이 아닌 인문학 연구자, 지방대 출신의 테너, 출산 휴가 간 교사를 대신해 일하고 있는 기간제 교사가 살아가는 링 밖의 현실에서 확실한 승리는 없다. 찝찝한 판정패뿐이다. 대중이라는 판정단은 지방대 출신 테너의 노래를 노래 그 자체만으로 들어주지 않는다. 박주영 역시 박현성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선수가 아닌 '체육관' 선수였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박주영에 대한 내 관심 역시 그녀가 '서울대 출신'이지만 복서였다는 것에 있지 않았던가.
이진혁 감독은 고교 중퇴 후 독학 끝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계라는 링 위에서 '최종학력 중졸' 감독은 이겼을까? 2013년 '링' 제작 후 아직 이어진 작업은 없다. 박주영, 박현성, 이진혁 모두 패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직업'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도 다시 글러브를 끼고, 대회에 출전하고, 영화를 만든다. 생업이 직업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판정패를 하더라도 '현실이라는 벽을 향한 주먹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모든 종류의 '주먹질'에야말로 희망이 있다. 영원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벽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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