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풍경을 각 주제를 통해 엮은 이 책은 절이나 주변 관광지를 소개하는 일반적인 산사 기행과는 사뭇 다르다. 지은이는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사찰을 여행하면서 느낀 생각을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다. 고색창연한 절집 분위기에 감탄하면서도 시종일관 내면으로 향하는 자기 점검만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신비로움과 긴장감으로 기행을 시작하던 전반부와 달리 횟수가 거듭할수록 노련하고 독특한 저자만의 불심이 느껴져 흥미를 끈다. 불교적인 색채가 주를 이루지만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와 민간신앙, 때로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의식의 유연함으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특히 일상에서 빚어지는 사랑과 아픔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솔직함이 그대로 드러나 읽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생계의 부담을 묵묵히 짊어진 채 살아가는 남편의 존재가 싸하게 다가온다. 문득 그가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치열하게 도를 행하고 깨달음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전쟁터, 어쩌면 형이하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형이상학적일 수 있다. 일상을 돌아보니 도(道) 아닌 것이 없다. 좀 더 깊고 그윽한 눈길로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 도를 행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영천 은해사 운부암-중에서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빈집을 기웃거리며 바람처럼 떠돌고, 그 뒤로 하얀 첨탑이 보인다. 도시 냄새가 나는 짙은 벽돌건물의 교회는 분명 절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붉은 지붕으로 통일했다. 299명의 주민들과 갈등 없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다른 종교 앞에서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높다랗게 걸려 있는 십자가가 관세음보살상만큼 정겹다. 끊임없이 테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톨레랑스라는 관용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던 프랑스의 분노, 지금 세계는 불안에 떨고 있다. 삶과 신앙의 빗나간 관계를 생각하며 잠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놀랍게도 나는 작은 섬에서 처음으로 가장 큰 기도를 한 셈이다. 바람이 해수관음상의 허리를 감싸 안다가 십자가를 한 바퀴 돌고 사라진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가파도 대원사-중에서
지은이 조낭희는 머리말에서 "불교 지식이 많이 부족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의욕으로 산사 순례에 나섰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참 친한 이웃이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일까? 법당에서 절하는 일이 결코 낯설거나 어색하지가 않았다. 산사를 찾아다니는 동안 자동차 안에서 신부님께 축복받은 예쁜 묵주가 흔들거리며 용기를 주었다. 고찰의 정취와 바람 소리, 풍경 소리만으로 마음은 편안했다. 법당에 들어서면 고해실에 들어선 듯 존재에 대한 진지함과 자기 점검에 따랐고,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곤 했다"고 썼다.
'때때로 텅 빈 절간에 앉았노라면 나도 모르게 심산해지곤 했다. 석탑도 석등도 없는 마당은 연대감을 상실한 자의 소외감 같은 고독을 떠올리게 했고 뒤꼍에 있는 석탑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그저 애잔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서두름 없이 고요히 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작은 절, 점잖은 주지 스님과 지성을 갖춘 지산 스님의 따뜻한 눈빛과 행동 속에서 젊고 희망찬 압곡사의 미래를 보았다.' -군위 압곡사-
지은이 조낭희는 상주 출생으로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경북대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그리운 자작나무', 글쓰기 이론서 '엄마 쓸 게 없어요' '어머니가 가르치는 어린이 글쓰기'를 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영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80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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