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두봉 주교의 노년

마을길을 따라 두 바퀴 돌았지만 두봉(杜峰) 주교의 집을 찾지 못했다. 휴대전화로 다시 길을 물었다.

"그 자리에 있으세요. 내가 나갈 테니…."

10m쯤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모습은 3년 전 필자를 만났을 때처럼 건강해보였다. 악수하는 손은 부드러웠지만 힘차고 유쾌했다. 마음속으로 그의 나이를 헤아려보니 88세, 노년의 끝자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삼복더위의 열기가 가득했다.

"나이가 들면 실수가 잦아져요. 기억력이 떨어져 가끔 약속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착각하고, 판단력과 의지력도 약해지고…."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필자를 위로하는 말로 들렸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황혼의 고통으로 비쳤다. 병에 든 맥심 커피와 크림, 설탕을 내놓았다. 건강과 일상에 대해 물어보자 박장대소하며 손사래를 쳤다. 문제없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한국에 와서 생마늘과 양파, 김치 등을 즐겨 먹다 보니 위장에 부담을 준 것 같아요. 다른 곳은 이상무…. 1년 중 절반은 강연과 피정지도를 하느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니까."

두봉 주교가 프랑스를 떠나 우리나라에 입국한 것은 1954년, 한국 생활 환갑을 넘긴 셈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횡단하고 있으나 회한보다 애정이 넘쳐났다. 단지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는 야단법석과 그것들만 전달하는 매스컴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약간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푸른 눈동자가 섬세하게 빛났다. 1990년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한 후의 여정을 짧게 요약해주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작은 성당에서 15년간 지냈지요. 안동을 떠난 것은 후임 주교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원로 행세를 하며 후임에게 전관예우를 갈구하는 부류들과는 달랐다. 반대로 그는 조용히 피해서 반성하며, 새로운 각오로 또 다른 삶을 설계한 것이다. 11년째 거주하는 의성군 봉양면 문화마을 역시 안동 교구 내에서 오지로 꼽히는 곳이다. 언제나 고향을 한국 안동이라고 주장하는 르네 뒤퐁(두봉 주교의 세속 이름)의 노년은 나눔을 실천하되 고독한 홀로서기로 비쳤다. 다른 노년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궁금했다.

"강연 중에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 웃음보따리를 아무리 풀어놓아도 무표정한 그들을 보면 끔찍합니다. 생동감을 잃은 노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것이지요. 나머지는 노 코멘트!"

농사짓는 일이 유일한 취미라는 두봉 주교. 잠깐 대화를 멈추고 텃밭으로 만든 앞마당으로 나갔다. 토마토와 고추 등을 한 아름 따서 필자에게 건네는 그에게서 넉넉하고 품격있는 노년을 보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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