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들에게 죄인입니다."
아들(23) 얘기를 꺼내자마자 목이 멘 정수환(59) 씨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정 씨는 신장까지 망가졌고 3년 전부터 원인 모를 각혈로 고생하고 있지만 '병든 게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다만 어린 시절 엄마 없이 홀로 아픈 아버지를 돌봐야 했던 아들에게 죄스러울 뿐이다. "내가 하도 아픈 데가 많아서 걸핏하면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그 어린 것이 다섯 살 때부터 엄마 없이 아빠 병간호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픈 아버지를 둔 아들은 서울의 유명대학 의과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아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정 씨에게 "커서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었고, 정 씨는 "아빠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가 되라"고 했다. 공부를 곧잘 했던 아들은 그때부터 더욱 공부에 열의를 보였다.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정 씨가 TV 소리를 낮추면 아들은 방에서 나와 "괜찮다"며 소리를 다시 높였다. 정 씨가 아플 땐 잠들 때까지 간호한 뒤 밀린 집안일을 하고 다시 책을 펴드는 아들이었다. "아들이 어릴 때 물을 좋아해서 수영장만 가면 나올 줄 모르고 놀던 모습이 아직 눈에 아른거려요. 그랬던 녀석이 장성해서 '돈을 버는 의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네요."
◆하반신 마비에 신장병까지
아들이 서울로 떠나고 홀로 남은 정 씨는 종일 누워서 TV만 본다.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몸 탓이다. 5년 전부터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보조인마저 없을 때는 끼니를 라면으로 때운다. 정 씨는 "요의를 느껴도 화장실에 가기 힘들어 방바닥에서 일을 보는 일도 잦다"고 멋쩍어했다.
정 씨는 열여덟 살에 암벽등반을 하다 추락해 열흘 만에 깨어났다. 다친 척추를 수술했지만 결국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 다리 근육이 위축돼 팔목보다 더 가늘어졌고 지난해에는 오른쪽 다리의 힘줄을 다쳐 무릎 위를 절단했다. "30, 40대에는 도장 새기는 일이라도 했는데 그마저도 양쪽 손목에 병이 나서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았어요. 그때부터는 욕창을 달고 살아요."
신장마저 기능을 잃었고, 이틀에 한 번꼴로 투석을 받은 지 20년이 넘었다. 꼬박 4시간 동안 투석을 받고 나면 온몸이 고단해 하루종일 끙끙 앓는다. 주삿바늘에 수천 번 찔린 왼쪽 팔은 혈관이 굵어져 울퉁불퉁 불거져 있다. 신장이식도 늦은 상태다. 투석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방광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탓이다. "요즘에는 피를 심하게 토하는데 검사를 해봐도 원인을 잘 모르겠데요. 장기가 다 상해버린 모양인지…."
◆아들의 꿈에 짐이 될까 걱정
"내가 돈이 없지 마음은 부자예요." 정 씨는 "지금껏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사춘기 반항도 없이 잘 자라준 아들 덕에 행복하다"고 했다. 18년 전 아내와 헤어지고, 없는 솜씨에 겨우 차려준 밥상에도 다섯 살 아들은 반찬투정 한 번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에도 정 씨가 휠체어를 타고 학교 앞으로 마중 나가면 멀리서 보고 "아빠" 외치며 달려와 안겼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착하게요. 내가 하반신에 감각이 없으니 실수로 설사를 하곤 했는데 그걸 묵묵하게 다 치워줬어요. 맨날 덧나는 욕창에 소독제와 약을 발라주고…. "
"아들은 나한테 모든 것을 해줬어요. 그런데 정작 나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정 씨는 자책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국가에서 매달 받는 지원금 100만원 중 70만원을 아들에게 부쳐주고 자신은 남은 돈으로 겨우 병원에 다니면서도 "아들에게 더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최근 아들에게는 꿈이 생겼다. 의과대를 졸업하고 해외로 의료봉사를 가는 것이라고 했다. 정 씨는 아들이 꿈을 이룰 때까지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다. "꿈이 생긴 아들에게 짐이 될까 늘 걱정입니다. 제 걱정은 말고 아무쪼록 훌륭한 의사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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