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정성왕후가 죽자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 가운데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았다. 중전 간택을 통해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 1759년 혼례를 올렸다. 15세인 정순왕후 김 씨와 66세 영조의 혼인은 조선 왕실에서 연령차가 가장 큰 혼사였다.
정순왕후에 관한 후대의 평가는 '정조 독살설'을 비롯한 '개혁 정치 뒤집기' '세도 정치의 빗장을 연 수렴청정' 등 여러 대목에서 엇갈린다. 정조와의 대립 여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그의 영특함과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강효석의 '대동기문'(大東奇聞)에 나오는 야사로 중전 간택 때의 이야기다.
간택장에 나온 규수들에게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부분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했다. 하지만 유독 김 씨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했다. 연유를 묻자 '물건의 깊이는 측량할 수 있으나 인심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고 답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목화꽃'이라고 답했다. '잠시 좋은 꽃보다 천하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다'고 말해 영조를 흐뭇하게 했다. 속이 깊고 지혜로움이 비교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012년 대선에서 51.6%가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영조와 같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도 없지 않았겠으나 인심은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그를 첫 여성 대통령에 올렸다.
하지만 밑천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뜬금없는 인사는 마구 헝클어졌고 국정은 엉망진창이 됐다. 4년 내내 이어진 불통 정치는 결국 최순실 게이트로 막장에 몰려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추락했다. 김병준 총리 내정 등 깜짝 인사가 계속되자 아예 5%로 곤두박질쳤다.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가장 낮다. 야당에서 '단계적 퇴진'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순실 무리의 '요망'(妖妄)함이 대통령의 과오를 키웠으나 본질은 아니다. 인심을 모르고 국가를 내팽개친 박 대통령의 잘못이다. 그의 무능함이 나라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불신의 사회를 초래한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최순실의 마음이 아니라 인심을 얻고 국민행복을 위해 일했다면 '5%'가 아니라 '50%'는 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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