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988! 빛나는 실버] 대구문인협회 '병술년 개띠 모임'

대구문인협회 병술년 개띠 동갑내기들이 지난달 31일 황인동 시인 사무실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허홍구 시인, 허수현 시인, 박방희 시인, 황인동 시인, 방종현 수필가, 유가형 시인, 정재숙 시인.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대구문인협회 병술년 개띠 동갑내기들이 지난달 31일 황인동 시인 사무실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허홍구 시인, 허수현 시인, 박방희 시인, 황인동 시인, 방종현 수필가, 유가형 시인, 정재숙 시인.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동갑내기들의 모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끌벅적하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다가도 갑자기 박수소리가 넘치는 등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대구문인협회에도 이런 유쾌한 모임이 있다. 병술년(1946년) 개띠 갑장모임이다. 10월의 마지막 날, 남구 대명동의 한 찻집에서 열린 이들의 모임에 동석했다.

동갑내기들은 모두 13명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문인협회에 이렇게 많은 병술년 개띠생들이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모임은 지난해 연말 처음으로 발족됐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갑내기들이 함께 모여 삶을 나누고, 문학도 논하면서 각자의 창작활동에 윤활유 역할을 하자는 것이 취지이다. 이후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나는데, 중간에 친구들의 출판기념회나 시낭송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득달같이 달려온다.

이날은 신문사에서 취재 온다는 소식에 7명이 시간을 냈다. "만날 때마다 자유로운 '개판'이 된다"고 껄껄 웃는 이들의 첫 대화 주제도 개(犬)로 시작했다. "내가 개띠다 보니 갑장 친구 둘만 모여도 '개판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이 모임의 방장인 방종현 수필가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개판 오분 전'은 무질서하고 아수라장인 상태를 부정적으로 나타내는 말인데, 원래 어원은 달라. 개판의 '개'는 '개 견(犬)'이 아니라 '열 개(開)'야. 이 말은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시작됐지. 피란민들을 위해 종종 가마솥에 밥을 짓고 배급을 했는데, 그때 밥이 다 됐음을 알리는 말이 "개판 오분 전!"이었지. 이 말을 들은 굶주린 피란민들이 먼저 배급받기 위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됐고, 그런 상황이 '개판 오분 전'으로 잘못 알려져 비속어처럼 쓰이는 거지."

시인이 8명이고, 수필가는 5명으로 모두 문인들이지만 하는 일은 다양하다. 대학교수, 소아과 의사, 출판사 대표, 퇴임한 고등학교 교장, 부군수 출신 등 전력이 화려하다.

박방희 시인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자신의 동시가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성주가 고향인 박 시인은 1985년 무크지 '일꾼의 땅' '민의' '실천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최근엔 한국을 빛낸 동시인 111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구에 사는 다른 친구와 달리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허홍구 시인은 '염매시장 아지매'로 유명하다. 기자가 허 시인의 '아지매는 할매되고'라는 시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더니, 껄껄 웃었다.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벌인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이 시를 처음 읽은 뒤 시를 쓴 사람이 참 솔직하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 허 시인의 모습은 생각 그대로였다. 친구들은 허 시인에 대해 "허 시인은 사람 좋아하고 인간미 넘치는 다정한 낭만주의자다.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아무리 화가 난 사람도 허 시인과 대화를 나누면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돈다"고 평가했다.

유가형 시인은 26년 동안 3천 시간 자살예방 전화상담 자원봉사 및 생명지킴이의 집 활동 등의 공로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또 최근엔 이웃사랑과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 공로로 '제16회 우정(牛汀) 선행상'과 함께 받은 상금 1천만원 전액을 불우이웃들에게 후원한 사실이 늦게 알려져 훈훈함을 더한 여성 시인이다. "매일신문과는 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을 받으면서 인연이 깊다"는 유 시인은 "요즘 북구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상대로 상담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도 부군수를 역임한 황인동 시인은 친구들이 인정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경북도청 공무원 시절, 고등학교 1학년 딸의 생일을 맞아 딸에 대한 사랑의 시를 쓴 것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시인으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그는 피아노, 색소폰, 아코디언, 기타, 하모니카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모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분위기 메이커'다.

이들은 나이를 먹고, 점점 익을수록 문학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대구문인협회 이사인 정재숙 시인은 "일단 정신건강에 좋다. 또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살아가기 때문에 늙을 수가 없다"고 자랑했다.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허수현 시인은 "앞으로 우리 모임이 사적인 모임에 그치지 않고, 재능기부를 통해 지역의 다른 분들과 함께하자고 공감하고 있다"면서 "내년부터 병술생 개띠들의 난장판을 기대해 주세요"라고 활짝 웃었다.

이들 외에도 이 갑장모임에는 이동민 수필가, 노덕경 수필가, 최진근 수필가, 최달천 수필가, 박창기 시인, 이은재 시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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