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농촌의 작은 고을들은 대부분 가난했었다.
그 시골에서 내가 자란 곳은 동성동본 집성촌이었고 약 40호가량의 작은 부락이었다.
마을에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닷새마다 열리는 5일장이 있었다.
집집마다 장날엔 제각기 장 볼 일이 있었고 장날 풍경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개나 닭 따위를 보자기에 싸들고 가는 사람, 오곡잡곡을 이고 지고 가는 사람, 누구도 예외 없이 돈은 오롯이 그 보따리에서 나왔으며, 국민(초등)학교 월사금(등록금, 내가 3학년 지나서 폐지됨)까지도 마련되는 장날이었다.
고을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할아버지들과 각층 사람들의 장 나들이는 틈틈이 길을 이었다.
마을 할아버지들은 장날에만 끓여 파는 얼큰한 국물에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고 나서 장 볼일을 마쳤다.
해 질 녘, 골목에서 놀이하는 개구쟁이들 저녁밥 먹으라고 불러대는 목소리들이 고운 노을빛을 흔들 때, 장에서 귀가하는 할아버지들도 때맞춰 어우러졌다.
지푸라기로 묶은 생선 한 손을 느슨하게 들고 반듯하게 쓰셨던 갓이 삐뚤어져도, 품위 손상에 지장 없는 특혜를 누리기에도 좋은 날이었다.
내게도 필요한 물건들이 있으면 엄마가 사다 주었지만, 맞춰서 사야 할 신발이나 그 외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필요할 때는 가끔 장 나들이를 했었다.
내 나이는 어렴풋하지만 생생하게 기억되는 어느 장날.
물건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네다섯(정확지 않음) 살 된 꼬마를 데리고 온 인척 아주머니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봄 햇살에 평온한 시골길을 꼬마는 앞서 걷고 아주머니와 나는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꼬마의 등짝을 세게 한 대 내려쳤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투정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앞서 걷고 있는 꼬마를 느닷없이 왜 때리는지. 내가 너무 놀라서 호들갑스럽게 다그쳐 물었다.
"왜 아를 때리는데요?"
"지가 맞을 짓을 했는기라."
"잘 가고 있는데 무슨 맞을 짓을 했다꼬요?"
"사탕 깨물었잖아."
"그기 와 맞을 짓인데요?"
"빨아먹으라꼬 매낙끈(매번) 케삿는데 고마 깨물었뿟잖아."
"왜 꼭 빨아먹어야 되는데요?"
"그래야 오래가지 깨물마 금방 먹어치아뿌고 안 걸을라꼬 고달내마 우야노. 안주 한참 가야 할낀데…."
아이는 우리가 아웅다웅하는 대화에도, 등짝이 '쩍' 소리가 나게 맞은 것에도 일말의 반응 없이 입안에서 빠지작 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잘도 걷고 있었다.
그저 빨아먹기 감질나서 날름 깨물어 먹어치운 사탕 맛에 등짝 한 대 내 준 것으로 흥정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인지.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엄마와의 계약 위반을 꼬마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늠름한 아이의 태도를 봐서 그 실랑이는 장날마다 치렀거나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두 사람은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잠시 후 나는 그들과 헤어져서 지름길인 산길로 접어들었고 꼬마와 아주머니는 뽀얀 먼지가 일고 있는 나른한 시골길, 자박자박 걸어서 철길 건널목 지나고 냇물을 건너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난이 낳은 등짝 한 대, 입안에 든 사탕도 어른들의 계산과 편의에 맞춰내야 하는 부당한 대우에도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마을 어른들은 모두가 부모였고 그분들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복종했으며, 손윗사람에게 대적하거나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못했어도 개의치 않았던 시절.
지금 그들은 한 가정의 훌륭한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그 누구도 훈육의 회초리조차 용납이 안 되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매를 거두어 간 대신 학원으로 몰리며 스마트폰 게임과 초를 다투는 정보로 신체 나이보다 정신 나이가 더 빨리 성장하는 시대에 넘쳐나는 물자.
몽당연필도 소중했던 그때 아이들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믿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때는 가난해도 몸서리치지 않았고 눈에 불을 켜지도 않았다.
빈부의 격차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무지해서였을까. 그 시절이 먼 옛날이라고 하기엔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해 버렸다.
21세기의 문화를 깐엔 누리고 살면서도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리운 것은 왜일까?
가난 속에 깃들었던 작은 행복들이 버거운 세월과 함께 따라오지 못해서일까, 내가 데려오지 못해서일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나 역시도 버거웠던 도시 생활에 여태 적응을 못 해서도 그럴 것이고 그도 아니면 가난과 친숙한 내 정서까지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아직도 내 생각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 부자로 가는 첩경이 아닐 것 같고 행복도 아닐 것 같은데….
부자의 잣대는 각자 기준 차이겠지만, 나는 도서관 책으로 울고 웃으며 진종일 파아란 하늘을 맞대고 살 수 있음에 등짝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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