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히든 피겨스

NASA 달 탐사 프로젝트, 흑인 女 결정적 역할에도

J. F.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1960년대 초, 미국은 소련과 우주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히든 피겨스'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하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 프로젝트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세 명의 흑인 여성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트럼프 시대가 시작된 미국의 2017년을 상징하는 영화처럼 다가온다. '강한 미국'과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우며 인종차별과 성차별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하는 트럼프의 등장에 반발하듯, 최근 화제가 된 미국영화 중 인종 이슈와 성 이슈를 내세운 영화들이 많다. 지난달에 개최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영화인 '문라이트'는 흑인 게이 남성의 정체성 찾기가 주제이고, 흑인 배우들이 여우조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히든 피겨스'는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제목인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우리말로 옮기면 '숨겨진 숫자'나 '숨겨진 인물'이 될 터인데, 한 흑인 여성 수학자가 풀어낸 수식이 프로젝트 성공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녀의 존재와 숫자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의미를 띤다. 통쾌하고 뭉클한 작품이다. 5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울리는 경종이 꽤 크게 다가온다.

1962년 NASA의 머큐리 계획을 수행한 NASA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에서 활약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실재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이 극적으로 배치되어 드라마적인 재미를 만들어낸다. 새 시대를 개척한 세 영웅은 바로 캐서린 고블린, 도로시 본, 매리 잭슨이다.

영화는 학창 시절부터 수학 천재였던 캐서린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NASA의 직원이 된 삼총사가 출근하는 길에 이를 미심쩍어하는 백인 경찰관과의 해프닝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으로 NASA에서의 생활을 펼쳐보인다.

수학자인 캐서린은 프로젝트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천재적인 두뇌로 방정식을 완벽하게 풀어내어 스스로 금기의 벽을 뚫는다. 두꺼운 안경을 쓴 전형적인 천재 너드 캐릭터인 캐서린은 태스크 그룹에 들어가지만, 백인 연구원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성과 인종의 벽을 동시에 깨야 한다. 그녀는 분리 정책이 노골적이던 1960년대에 화장실을 향해 20분 동안 빌딩 사이를 끊임없이 뛰어다닌다. 여성이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할 수 없고, 흑인이기 때문에 백인 연구원들과 커피포트를 공유할 수 없다.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은 흑인 여성 최초로 NASA의 컴퓨터 팀 수장이 된다. 도로시는 세 인물 중 가장 도전적인 캐릭터로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꿈을 꾸도록 이끈다. 단순한 기계적 업무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초기 IBM 컴퓨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공학자이자, 흑인 여성들의 위치를 확장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매리 잭슨(자넬 모네)은 물리학자로, 흑인을 받아주지 않는 당시 대학의 고리타분한 정책에 도전하여 백인 남자들 사이에서 용기 있게 끼어든 매력적인 여성이다. 매리는 패셔너블하고 왈가닥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영화를 신선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팀의 수장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과 우주인 글렌 파월, 그리고 우주 개발 연구원 짐 파슨스는 당시 인종문제를 대하던 세 가지 유형의 백인 전형성을 대표한다. 영화에서 허구의 인물로 창조된 알 해리슨은 실용주의자로 인종은 어찌 됐든 간에 우수한 두뇌를 원하는 인물이며, 글렌 파월은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모든 이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자유주의자이다. 그리고 짐 파슨스는 흑인과 여성은 백인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신념을 지닌 자이다. 이 세 사람이 세 흑인 여성들과 맺는 다양한 형태의 긴장 관계는 자잘한 에피소드로 재현되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두뇌에는 색깔이 없다. 성차별,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남들은 꾸지 않았던 불가능한 꿈을 꾼 자들이 있어서 세상은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는 진리를 영화는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냉전시대의 미소 우주전쟁, JFK와 흑인민권 투쟁을 찍은 기록영화가 삽입되어 실화가 주는 생생함과 감동을 더한다. 독특한 색깔로 완성된 1960년대 소울 음악은 세 여성의 발걸음에 맞추어 만들어져 영화를 보는 깊이를 더한다.

영화는 쉽게 따라갈 수 있는 플롯 구조를 채택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미 지나간 시대가 되었지만, 오바마 시대의 '새로운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주제의식이 연대기적 플롯의 정공법적 영화 문법으로 표현된다. 진보의 시대를 기대하는 관객, 과학 마니아, 역사에 대한 지적인 관심으로 충만한 관객에게 환영받을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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