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소녀상과 순종 동상

'대구 평화의 소녀상'과 '순종 동상'.

소녀상은 올해 3'1절을 맞아 대구 2'28기념중앙공원 앞에 자리를 잡았고, 순종 동상은 지난 11일 제막식과 함께 공개됐다. 굴곡진 우리 역사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탄생 과정 등 뭇 사연도 다르고 대구 중구청이라는 관청의 대접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

먼저 비용 문제다. 소녀상은 그야말로 숱한 시민 성금이 한 푼 두 푼 모인 결과다. 순종 동상 관련 제작에는 '억대'의 나랏돈이 들었다. 위치 선정도 분명하게 차이 난다. 소녀상은 사람 발길이 잦은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덜 붐비는 곳으로 쫓겨났고 순종 동상은 도심 공원의 상징인 달성공원 앞에 모셔졌다.

특히 순종 동상은 '어가길'이라는 70억원을 들인 '비단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70억원은 1910년 당시 물가로 환산하면 약 27만원으로, 1907년 대구국채보상운동을 벌여 일본에 갚으려던 1천300만원의 전체 빚 2%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한 연구자는 1910년도 쌀 144㎏은 6원97전으로, 2016년 기준 쌀 가격 18만원과 비교해 당시 1원의 가치는 현재 2만6천원이라고 밝혔다)

또 소녀상은 구청의 반대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는데도 2개월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순종 동상은 1909년 1월 8일 순종이 대구에 올 때처럼 쉬웠다. 당시 관에서는 순종 어가길을 위해 '급히 시가도로를 개통'해야 했다. 그래서 '도로와 온돌 집 위로 백묵으로 두 줄 선을 그은 다음 군대가 출동하여 하룻밤 사이에 강제적으로 가옥을 철거'하며 길을 냈다.

이번 순종 동상 무대를 위해 중구청도 오십보백보의 일을 했다. 주변 상인들의 불편 호소에도 도로 한가운데 비좁은 차로 일부를 없애버리고 동상을 세울 무대는 널찍하게 마련했다. 옛 기록이 생생하게 전하는 것처럼 '날이 새자 도로가 훌륭하게 되었으니 당시의 한국 아니면 볼 수 없었던 일'이 오늘날에도 재연된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황제 즉위식을 본뜬 순종 동상이 과연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정신을 담아내고자 한다'는 설명처럼 보는 이들에게 와 닿을지 궁금하다. 조각상에는 작가 등 조각 제작의 정보도 없다. 자칫 정체불명의 깜깜이 동상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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