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신보다 남편, 정치인 아내는 감정노동자?…『그대의 명함』

권오을 前 국회의원의 부인 동반자로서 삶 이력 담아

권오을 전 국회의원의 부인 배영숙 씨가
권오을 전 국회의원의 부인 배영숙 씨가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담은 수필집을 내놨다.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큰 직업은? 각자 기준과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정치인의 아내도 유력한 후보군에 든다. 철저히 자아를 누르고 살아야 하는 데다 이름을 감춘 채 '○○○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숙명 때문이다.

이 책은 전 새누리당 권오을 의원의 부인 배영숙 씨가 쓴 수필집이다. 모처럼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름표를 떼고 자신의 이름을 책표지에 박았다. 책 제목도 '그대의 명함'으로 정했다. 자신의 이름보다 배우자의 명함을 위해 살아야 했던 슬픈 추억이 배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소년 권오을과 짝으로 만나 사랑을 키우고 5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한 배 씨는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정치인의 동반자로서 살아온 삶의 이력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냈다.

이 책엔 모두 39편의 작품이 실렸다. 배 씨가 수필창작센터를 노크한 지 20년 만이고 문단에 이름을 올린 지 17년 만이다.

권 전 의원은 권두언에서 "내 아내는 자기 이름으로 살았으면 뭔가 당당하게 이름을 빛냈을 사람이지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며 "눈가 주름과 머리에 내린 서리를 보니 안쓰럽고 미안하다"고 적고 있다.

저자가 수필집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남편 권오을의 20대 총선 출마가 좌절되면서다. 34세부터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왔고 환갑이 넘도록 정치판에 머물렀지만 이제 더는 '남편의 일'에 끌려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저자는 안동집을 대충 정리하고 서울집에 칩거하며 지난날의 삶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중'고교시절 일기장, 아이들의 육아일기, 거기에 수필교실에서의 습작들이 모이면서 부(部)가 되고 편(編)이 되어 단락과 행을 메워갔다.

'60에는 60을 넘어서는 글을 쓰겠다'는 각오를 다진 저자지만 막상 펜을 잡았을 때 '60 생애를 아우르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글을 쓰면서 이상하게 유년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온 25년 세월만이 내 기억 속을 채우고 있었던 거죠." 저자는 고심 끝에 유년기의 추억은 접어두고 1996년(제15대 총선)부터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에는 작가의 60년 삶의 이력이 소상히 적혀 있다. 1부 '꿈꾸는 집'에서는 북한산 밑 아파트에서 누리는 소소한 일상의 삶들과, 교사'민속학자'큐레이터'요가 지도자를 꿈꾸며 쉴 새 없이 도발을 일삼던 저자의 극성스러운 도전기가 담겨 있다.

2부 '이젠 잘 안 들리네'에선 서서히 찾아온 난청에 놀라 걱정하는 이야기 '100근이 다 돼가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운동에 매진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본격 정치인의 아내로 살던 시기 기록인 3부 '그대의 명함'은 부부의 고단한 정치 역정이 담겨 있다.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성당 고해소에서 손수건 한 장을 흠뻑 적신 이야기, 선거철을 맞아 남편의 명함을 돌리는 부인들을 보며 몇 년 전 자신이 걸었던 길을 회상하기도 한다.

4부 '두 아들'에서는 이제 장성한 아이들과 추억을 더듬고, 5부 '소년과 소녀'는 1967년 안동초등학교에서 짝으로 만났던 두 꼬마가 중'고교를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60여 쪽에 빼곡히 글을 써내려 갔음에도 저자는 기억력의 한계로 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삶의 '매듭' 탓에 많은 구간이 여백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그를 가두고 있는 '정치인의 아내'라는 기억에서 탈출하고, 푸릇한 유년의 기록이 다시 돋아난다면 저자는 다시 펜을 들 것이다. 그땐 아마도 '나의 이름, 자신의 명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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