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환멸 예방주사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은 폴란드 국민에게 '루스벨트의 배신'으로 각인돼 있다. 나치가 물러간 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이 배신당하고, 폴란드가 소련 위성국으로 전락한 것은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요구를 들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국민만 배신당한 게 아니다. 루스벨트도 배신당했다. 스탈린에게.

당시 폴란드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었다. 나치의 침공 뒤 폴란드 제2공화국 인사들이 런던에 세운 친(親)서방적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련이 폴란드 동부의 루블린에서 조직한 '루블린 인민해방위원회'가 그것이다. 런던 망명정부가 정통성이 있었지만, 현실적인 힘에서는 '루블린위원회'가 우위에 있었다. 폴란드를 나치에게서 해방시킨 것이 소련이기 때문이다.

얄타회담에서는 이런 현실을 감안한 합의가 이뤄졌다. 런던 망명정부와 루블린위원회가 연합해 임시정부를 구성하되 조속한 시일 내에 모든 민주 세력이 참여하는 자유선거를 실시해 독립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고 루블린위원회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선거도 소련을 추종하는 폴란드 노동자당이 압승하도록 비공산주의 정당에 대한 협박과 후보자 살해 등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했다.

이는 예견됐던 것이다. 1945년 3월 23일 당시 소련 외상(外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선거는 소비에트 방식으로 치러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선거가 치러지기 2년도 전이다. 이에 루스벨트는 주먹으로 휠체어를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스탈린은 상대할 위인이 못 돼! 얄타에서 했던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다니!" 자업자득이었다. 루스벨트는 너무 순진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폴란드를 소련 위성국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얄타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만 했던 것이다.

9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 고위급 당국 회담을 앞두고 기대가 잔뜩 고조되고 있다. 여권을 비롯한 문재인 정부 지지층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석에 앉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그러나 김정은의 핵무장 완성을 위한 시간만 벌어주는 게 아니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루스벨트는 몰로토프의 선언 다음 달인 4월 12일 사망했다. 스탈린의 배신이 엄청난 심적 충격을 줬을 것이다. 남한 국민도 '역시나'에 대비한 마음의 예방주사를 맞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