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어느 해였던가. 우리 집에 거울이 필요했을 때, 누군가가 사온 거울엔 시 한 편이 하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요절한 시인 푸시킨의 시였다. 날마다 세수하고 얼굴을 닦으며 본 시라서 저절로 외워졌다.
삶의 근원도 잘 모를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는 늘 내 곁에서 읽혀졌다. 하루도 내 눈과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울이 사라진 후에도 그 시는 내가 외로울 때마다 저절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시를 통해 힘을 얻었으며, 나를 지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게 만들었다.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구절을 수십 번 떠올리며 슬퍼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그런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더불어 내 사색의 깊이는 조금씩 맑아지고 그 깊이를 더해가곤 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웃어야겠다'고 답을 내렸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숨보다는 미소를 띠며 자신을 다독였다.
한 친구는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슴이 너무 먹먹하고 아려서 터질 것 같아 지하 터널에 들어가 소리소리 질렀더니 가슴이 뻥 뚫리더라고 했다. 어쩌면 푸시킨의 그 시는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막힌 가슴을 뚫어주고 나를 이끌어 준 고마운 시였다. 러시아의 시인이 쓴 시가 바람을 타고 머나먼 한국으로 건너와 한 소녀에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글 중에서 오직 나에게 와 닿는 글이 된 것이다. 한 시인의 영감은 어린 소녀의 삶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요즘 부쩍 푸시킨의 고향 러시아가 그리워진다. 그의 문학적 향기가 배인 거리, 그가 사색하며 걸었을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로써 한 소녀의 삶을 건져준 그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감히 바치고 싶다. 그가 사랑의 결투를 벌인 그 거리에 장미 한 송이를 내려놓고 그 시를 읊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쩌면 내 삶을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난 웃고 있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럴 때일수록 더 웃으며 찬찬히 준비시키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엷은 미소로 시작해서 점점 짙어가는 웃음 속에서 삶을 헤쳐 왔던 것이다. 푸시킨의 그 시는 내 삶의 안내자였다. 머지않은 날, 그의 문학이 살아 있는 그곳으로 찾아가 장미꽃 한 송이 바칠 수 있기를 못내 기다린다. 이 나이까지 살아낸 날에 대한 감사로 꼭 방문하여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는 지치고 힘든 이에게 세상을 견뎌낼 수 있도록 치유해 준 사랑이었다. 그런 시 한 편 쓸 수 있다면…. 백지를 꺼내고 그의 시를 써내려가며, 왠지 소녀 같은 설렘에 빠졌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들은 다시 그리워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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