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푸시킨의 시 한 편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 가
  • 가

오래된, 어느 해였던가. 우리 집에 거울이 필요했을 때, 누군가가 사온 거울엔 시 한 편이 하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요절한 시인 푸시킨의 시였다. 날마다 세수하고 얼굴을 닦으며 본 시라서 저절로 외워졌다.

삶의 근원도 잘 모를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는 늘 내 곁에서 읽혀졌다. 하루도 내 눈과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울이 사라진 후에도 그 시는 내가 외로울 때마다 저절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시를 통해 힘을 얻었으며, 나를 지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게 만들었다.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구절을 수십 번 떠올리며 슬퍼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그런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더불어 내 사색의 깊이는 조금씩 맑아지고 그 깊이를 더해가곤 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웃어야겠다'고 답을 내렸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숨보다는 미소를 띠며 자신을 다독였다.

한 친구는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슴이 너무 먹먹하고 아려서 터질 것 같아 지하 터널에 들어가 소리소리 질렀더니 가슴이 뻥 뚫리더라고 했다. 어쩌면 푸시킨의 그 시는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막힌 가슴을 뚫어주고 나를 이끌어 준 고마운 시였다. 러시아의 시인이 쓴 시가 바람을 타고 머나먼 한국으로 건너와 한 소녀에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글 중에서 오직 나에게 와 닿는 글이 된 것이다. 한 시인의 영감은 어린 소녀의 삶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요즘 부쩍 푸시킨의 고향 러시아가 그리워진다. 그의 문학적 향기가 배인 거리, 그가 사색하며 걸었을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로써 한 소녀의 삶을 건져준 그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감히 바치고 싶다. 그가 사랑의 결투를 벌인 그 거리에 장미 한 송이를 내려놓고 그 시를 읊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쩌면 내 삶을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난 웃고 있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럴 때일수록 더 웃으며 찬찬히 준비시키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엷은 미소로 시작해서 점점 짙어가는 웃음 속에서 삶을 헤쳐 왔던 것이다. 푸시킨의 그 시는 내 삶의 안내자였다. 머지않은 날, 그의 문학이 살아 있는 그곳으로 찾아가 장미꽃 한 송이 바칠 수 있기를 못내 기다린다. 이 나이까지 살아낸 날에 대한 감사로 꼭 방문하여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는 지치고 힘든 이에게 세상을 견뎌낼 수 있도록 치유해 준 사랑이었다. 그런 시 한 편 쓸 수 있다면…. 백지를 꺼내고 그의 시를 써내려가며, 왠지 소녀 같은 설렘에 빠졌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들은 다시 그리워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유승민 전 국회의원은 DMZ 지뢰 폭발 사건의 합동참모본부 발표에 대해 북한에 대한 강력한 대응 부족을 비판하며, 군이 군답지 못하다고 분노...
프랑스의 재정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겹치면서 유로화의 가치가 17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고, 이는 프랑스 채권시장 불안과 내년 대통령...
대구의 운문댐 저수율이 22.9%로 급감하며 가을 가뭄으로 인한 식수 부족 우려가 커지고 있어 대구시는 낙동강 대체 공급을 확대하고 금호강 ...
2026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광유전학을 개척한 칼 다이서로스, 페터 헤게만, 게오르크 나겔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은 빛을 이용해 신경세포 활동..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