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기

미국에서는 유력 지방자치단체장이 대통령직으로 가는 유력 코스가 될 수 있다. 주지사를 지낸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이 단적인 예다. 지자체를 잘 경영한 경험을 토대로 둘은 대통령직도 잘 수행했다. 퇴임 후 매겨진 평가도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상당히 높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자체장의 대권 도전이 녹록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정치판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는 탓에 지자체장이 파고들 틈새가 거의 없다. 단, 서울시장은 예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거쳤듯이 수도 프리미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높지 않은 지자체장이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는 '투명인간' 취급받기 십상이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 TV토론 시작 전 스튜디오에 일찌감치 도착한 김 지사를 곁에 두고도 방송작가는 경북도지사를 찾았다. 김 지사는 자신의 얼굴이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대구경북과 사뭇 딴판인 서울의 분위기를 그때 실감했다고 한다.

"중앙지들이 경기도지사 기사는 잘 안 실어줘요. 어쩌다 기사가 나오면 꼭 그게 사회면이더라고요." 몇 년 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대개가 비판 논조인 사회면 기사가 정치인에게 달가울 리 없다. 명색이 수도권 광역단체장이자 국회에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쌓아온 그마저 이런 소외감을 느끼는 마당이니 여타 지자체장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대구경북의 경우 대권주자는커녕 거물 정치인 기근 현상에 시달린 지 꽤 오래다. 지난 대선 당시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홍준표 등 다른 지역 지자체장들이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대구경북민들은 부러움 반, 자조감 반을 느꼈다. 지역민들의 이런 상실감을 헤아렸는지 지난 대선 때 김관용 지사가 대권 도전에 나선 데 이어,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구시장 재선에 성공하면 대권에도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최근 밝혔다.

그런데 권 시장은 이 발언으로 큰 홍역을 치를 줄 몰랐던 것 같다. 발언 이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자체장들이 중앙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강도 높게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대구시장 일이나 잘하라"는 사실상의 타박이었다. 대구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차기 대선에서의 재수를 노리고 있는 홍 대표 입장에서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은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

홍 대표의 발언에는 지자체를 정당의 아래로 보는 우월 의식이 느껴진다. "공천 안 주면 재선조차 불투명한 대구시장이 감히 대권 도전을 운운해?"라는 오만함 말이다. 홍 대표의 발언은 평소 거침없는 어투를 감안하더라도 매우 유감스럽다. 대권 도전 선언 공방이야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권 시장을 공격한 사유 중 하나가 지방분권개헌 국민투표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6월 지방선거 때 지방분권개헌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대구시민 뜻을 받들어야 하는 대구시장으로서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다. 그런데 이를 놓고 홍 대표는 "용서치 않겠다"는 극언마저 쏟아냈다. 공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겁박과 무엇이 다른가.

홍 대표는 대구에 정치적 둥지를 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 북구을 당협위원장까지 맡았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거물 정치인이 지역에 오겠다는 것이 반갑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색이 당 대표라는 사람이 험지를 외면하고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했다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홍 대표의 대구행이 대구 정치판에 어떤 손익을 가져다줄지 현재로서는 예단키 어렵다. 하지만 그가 대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대구 사람들의 마음부터 헤아리겠다는 자세다. 지방분권개헌 요구 같은 지역민의 대표적인 열망을 외면하는 한 그는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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