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대구 시민들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기관차에 열쇠를 꽂고 홀로 피신한 전동차 기관사에게 피해를 키웠다는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지역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대구지하철참사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의 생각은 달랐다. 시민대책위는 사고가 커진 원인으로 '방염처리 부실에 따른 유독가스 방출'을 제시하고, 모든 전동차의 운행 중단과 전수조사를 요구했다.
당시 시민대책위 진상조사단 간사를 지낸 정현수 대구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는"참사 이후 대구 지하철 객차의 방염 수준은 높아졌지만 시민대책위의 발언과 주장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이었다"며 "15년이 지났지만 재난 대응 분야에서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늘 주변만 맴돈다"고 아쉬워했다.

◆시민사회 목소리 담지 못하는 재난 정책
재난은 예측이 어렵다. 따라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행정기관이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에 모두 대비할 수 없다. 시민 스스로 재난에 대비하고 행정기관과 긴밀히 협력하는'안전 거버넌스'가 보다 효과적인 이유다.
시민이 참여하는 안전 거버넌스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대구시는 2013년 7월 안전문화운동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시장과 시민 대표가 공동 위원장을 맡았다. 이 협의회는 사회안전, 생활안전 등 5개 분과에 시민단체에서 위촉한 31명을 두고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안전관리민관협력위원회, 통합방위협의회 등 민간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대구의 안전 관련 위원회는 12개에 이른다.
그러나 이 같은 안전 관련 단체들은 태생적으로 '관 주도'라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최종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시민이 참여하는 위원회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안전관리민관협의회 위원으로 참여 중인 김중진 대구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재난대응 민관협의체의 구성 면면을 살펴보면 시민 주도의 조직이 없다"면서 "재난 대응에 있어 시민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무기력증과 행정기관에 대한 불신 팽배
재난 예방과 대응 문제에 시민 참여가 활발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두려움'과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재난은 피할 수 없으며 극복하기 어렵다는 '두려움'은 재난 발생 시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감정은 재난 발생 시 시민들이 자구책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배정환 한서대 교수와 조성 충남연구원 재난안전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시민들은 재난 상황에서 무기력을 학습하고, 행정당국에 는 불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시민의 목소리가 조직화되지 못하고, 행정기관은 민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누가 구해주면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죽어야겠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의견을 뭐하러 내겠나' 등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시민 인식은 지역사회의 재난 대응 동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재난 대응과 관련된 시민조직을 법과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구시내 8개 구ㆍ군에는 각종 재난에 대비하고자 '지역자율방재단'이 조직돼 있다. 활동 인원도 2천380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조직이다.
이들은 재난관리부서와 협업해 자연재난의 예방 및 복구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지역자율방재단을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는 부족하다. 자연재해대책법과 각 구ㆍ군 조례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자율방재단을 직접 지원할 근거가 될 자율방재단법은 무관심 속에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 자연재난과 관계자는 "관련 법령이 미비하다 보니 예산 지원에 한계가 있고, 조직 자체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는 '피드백'을 원한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행정기관에게서 재난 예방과 대응의 주도권을 가져오길 원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대신 재난 경험 당사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행정기관에 쏟아낸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정현수 대구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는 "삶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여러 재난에 대해 시민사회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밝히는 행정기관의 피드백이 시급하다"고 했다.
시민사회의 부름과 행정기관의 응답이 원활해질 방법으로는 '재난 유형별 민간단체 설립'이 과제로 꼽힌다.
최용준 대구경북연구원 박사는 "일본은 재난 유형별로 민간단체를 별도로 둬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 행정기관이 정보공유를 하고 해당 단체는 임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행동한다"며 "우리나라도 재난 유형별 민간단체를 설립해 불명확한 재난 임무를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민의 신뢰를 얻을 '감성적 배려'를 강화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협 교육시설재난공제회 영남권지부장은 "낡은 주택이나 오래된 아파트 등 안전취약계층에 보급되는 화재경보감지기를 일률적으로 보급하면 '재난취약계층'이라는 낙인을 우려한 시민들이 오히려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면서 "시민의 안전 감수성까지 배려하는 재난 정책이 수립돼야 행정당국에 대한 불신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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