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파리의 공기 50cc, 유리병, 1919년
딱 일주일 후면 크리스마스이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왠지 설레는 밤이다. 이날은 가족이나 한 해 동안 큰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진다. 최근에 나는 포근하게 목을 감싸는 캐시미어 머플러 몇 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했다. 이런 물질적인 것 말고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대구의 공기를 선물로 보낸다면? 이 기발한 선물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을까?
20세기 미술에서 혁신과 도전, 도발의 아이콘인 마르셀 뒤샹(1887~1968)은 친구이자 몇 안 되는 그의 작품 컬렉터인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파리의 공기를 선물했다. 1919년, 크리스마스를 파리에서 보낸 뒤샹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약국에 들러 약사에게 생리식염수가 담겼던 유리병을 비우고 대신 공기 50cc를 채운 후 밀봉해달라고 한다. 아마도 약사는 매우 의아했겠지만, 멋쟁이 신사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주사기로 공기를 빨아들여 빈 병에 주입했을 것 같다.
원형 아래와 윗부분을 날씬한 호스처럼 만든 이 유리병은 당시 프랑스의 약국에서 기침약 같은 액체를 담아주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유연한 형태의 유리병도 예쁘지만 뒤샹의 레디메이드들 중 가장 서정적인 작품이다.
뒤샹은 유복한 가정의 예술적인 환경에서 자란 프랑스 출신 작가로, 그의 레디메이드뿐만 아니라 시간, 공간, 움직임의 역학관계를 기계로 표현한 작품들, 이미지와 언어의 단절을 반어법적으로 은유한 작품 등도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뒤샹은 예술가이면서도 예술을 반대하는 '반예술'(anti art)이라는 용어를 만든다. 미술 본연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개념인 '반예술'은 결과적으로 보면 20세기 미술을 진일보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미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13년의 <자전거 바퀴>를 시작으로 뒤샹은 스무 개의 레디메이드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샘>이다. 1917년 뉴욕에서 열렸던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나온 이 작품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아방가르드를 수용하는 전시를 표방한 이곳에서조차도 '샘'으로 명명한 이 남자소변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심지어 뒤샹은 작가 자신의 서명 대신 어디선가 차용한 '아무개'로 서명했다. 요컨대 작가의 상징적 위상조차 놀려먹은 것이다.
"세상은 이미 흥미로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소위 예술가 나부랭이들이 또 무언가를 만드는가?" 뒤샹은 불가침 조약처럼 지속되어온 '작가의 손으로 제작된 창작물, 미적 감상의 대상,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예술작품의 기존 필요충분조건을 단숨에 머쓱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흔해빠진 머리빗, 병걸이, 눈 치우는 삽 같은 공산품들을 미술작품을 기대하는 대중 앞으로 던지며 관습, 고정관념과 금기, 예술작품을 둘러싼 위선을 깨려는 시니컬한 시도를 했다. 일상 오브제가 예술적 맥락으로 편입됨으로써 예술적·일상적 공간이 상호침투하고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져버렸다. 예술의 신비를 해체하려한 뒤샹의 시도 덕분에 이후의 작가들에겐 무한한 자유가 생겼다.
1919년에는 고전 명화 중 명화로 일컫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복제품에 발칙하게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린 'LHOOQ'가 소개되는데, 이는 뒤샹이 즐기는 놀이(Ludism)로 반예술 개념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LHOOQ'는 불어 발음으로는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즉 그녀는 성적으로 흥분돼 있다는 문장처럼 들린다. 고전미에 대한 숭배를 비판한 뒤샹 이후 고전미술은 더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도, 절대미의 영역도 아닌 것이 된다.
뒤샹 스스로도 마지막 레디메이드라고 공표한 <파리의 공기 50cc>는 그의 친구인 괴짜 화가 달리에 의해 '성스러운 유리병(성체의식에서 사용하는), 유일하게 성스러운(divine) 레디메이드'로 불려진다. 뒤샹이 이 유리병을 성스럽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말이 다가오고 기발하고 좀 특별한 선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작품이다.
박소영(P.K Art & Media 대표)
댓글 많은 뉴스
[단독] 예성강 방사능, 후쿠시마 '핵폐수' 초과하는 수치 검출... 허용기준치 이내 "문제 없다"
與 진성준 "집값 안 잡히면 '최후수단' 세금카드 검토"
[르포] 안동 도촌리 '李대통령 생가터'…"밭에 팻말뿐, 품격은 아직"
안철수 野 혁신위원장 "제가 메스 들겠다, 국힘 사망 직전 코마 상태"
이재명 정부, 한 달 동안 '한은 마통' 18조원 빌려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