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두 회고록

서종철 논설위원
서종철 논설위원

대구 출신 언론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탄압 때문에 1973년 미국에 망명한 문명자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9년 국내에서 출간한 회고록으로 1986년 2월, 부정선거에 맞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 시민혁명의 현장 기록이다.

'값진 물건을 급히 챙겨 탈출하느라 대통령궁은 엉망진창이었다. 한 방에는 알맹이를 미처 꺼내지도 못한 보석 상자가 수북했다. 최고급 향수, 밍크코트가 그득한 옷방과 이멜다의 노래를 녹음한 순금 음반이 나뒹구는 것을 보고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문명자는 1970년대 같은 망명객 신분이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1983년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 야당 지도자 아키노가 공항에서 암살되자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 후보로서 시민혁명을 완수했다. 당시 코라손 아키노와 함께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낭궁에 일착으로 들어가 직접 목격한 것을 회고록에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이후 반전은 놀랍다. '3천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하와이로 도망간 이멜다는 당당하게 다시 돌아왔고, 아키노의 딸과 이멜다의 아들이 결혼하면서 사돈이 됐다. 하원의원이 된 이멜다가 의사당을 누비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런 희극이 또 있을까 싶다.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를 이유로 두 차례나 재판 출석을 거부한 그가 단골 골프장에서 종종 목격됐다는 폭로 때문이다. 또 건강 때문에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해명에 체납 지방세 징수팀이 가택수색도 못 하고 발길을 돌린 일이나 "남편은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이순자 씨의 발언도 공분을 샀다.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는 전직 대통령의 '알츠하이머 골프' 논란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알아들어도 2, 3분 지나면 까먹어서 기억을 못하고 이빨도 하루 열 번 넘게 닦는 상태'라는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국민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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