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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조선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은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내게는 일흔이 훨씬 넘은 일본인 지인이 한 사람 있다. 그 지인의 부친은 일본 대기업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회사가 일본의 전쟁범죄에 적극 가담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 그는 사직서를 낸 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한다. 내 지인의 부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다녀갔고 그들 중에는 침략자로서의 잔혹한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선 문화를 사랑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 행위에 대해서 속죄의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중에는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1914년 조선총독부 산림청 하급직원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마흔 한 살을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조선 문화에 매료되어 조선집에서 조선식 생활 방식을 지키면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는 특히 조선의 공예품에 심취했다. 그래서 황폐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 소멸되어 가고 있던 목공예품의 흔적을 기록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조선인의 생활용품인 소반과 관련한 사항을 기록한 '조선의 소반'(1928)은 조선과 조선 예술을 향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애정과 열정의 결과물이다.

소반이란 쉽게 말해서 밥상이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수많은 조선의 목공예 중 왜 하필이면 흔하디흔한 밥상을 조선 공예의 표본으로서 선택한 것일까. 그가 내린 답은 간단하다. '조선인들이 가난 때문에 정든 집도 팔고, 소도 팔고, 있는 것 다 팔고, 일가친척과 헤어져 머나먼 이역 땅 간도로 떠나면서도 결코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간 것이 늘 사용하던 소반'이었기 때문이다. 소반은 특권층의 예술품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간 생활예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소한 장식 하나도 제 나름의 역할을 지니고 있던 조선 소반의 실용적 아름다움에 감탄과 찬양을 표한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사라져가는 예술의 흔적을 쫓아다니던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열심히 선전하고 있던 때였다. 조선인을 무능하고, 열등하며 게으른 민족으로 매도한 후 그런 조선인을 문명화시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시키고 있던 때였다. 그 선봉에 선 것은 역시나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지배자로서의 오만함에 휩싸여 조선의 실재를 볼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이들과 달리 아사카와 다쿠미는 편견 없는 투명한 눈으로 사실을 보기를 원했다. 시간 날 때마다 조선 곳곳을 돌아다녔고,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의 작업장에 가서 숙련된 작업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는 '무념무상'에 빠져 소반을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은 '자본이 있어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이었던 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깨달음 덕분이 아니었을까.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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