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라는 단어, 해외여행을 떠날 때면 여권에 찍혀 있는 '대한민국' 네 글자, 국경일 곳곳에 휘날리는 '태극기'까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이지만, 따져보면 모두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피땀 어린 투쟁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종종 잊는다. 반면 '나라 없는 세상'에 살아봤던 이들은 그 절실한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매일신문은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애국지사 장병하(92) 씨와 대구 3·1 만세운동길을 함께 걸으며 1919년 그 날의 함성을 느껴봤다.

◆ 항일 거사 직전 붙잡혀 모진 고문
지난 21일 대구 중구 동산동 3·1 만세운동길. 철제 지팡이에 의지해 돌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던 장병하 씨의 눈길이 계단 옆 옹벽에 게양된 수많은 태극기에 잠시 멈췄다. "태극기는 언제 봐도 좋네요." 나라 없는 설움을 똑똑히 기억하는 그에게 '우리나라'와 '태극기'는 언제 들어도 뿌듯하고 새로운 단어다.
"그때는 완전히 '일본놈'이 다 됐었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고 배웠고, 일본말만 쓰게 하고, 우리 역사는 가르치지 않았으니 오죽했겠어요? 학교 동기생들과 독립운동을 시작하고서야 '우리에게도 나라가 있고, 충칭(重慶)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3·1 만세운동은 광복이 되고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사람이 우리 역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장 씨가 '독립'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8월이었다. 일제의 서슬 퍼런 민족말살정책 아래, 학교에서 우리말을 하다 발각되면 한 달이나 정학을 당하던 때였다. 아침이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워야 했고, 학교에서는 주로 군사 훈련이나 근로 봉사를 다녔다. 스무 살이 되면 징병 대상이 돼 전쟁터에 끌려가야 했다.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 동기생들과 꾸린 독서모임은 한 줄기 빛이 됐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책을 읽고, 민족의 현실에 대해 토론했다. 자연스럽게 모임은 '조선독립회복연구단'으로 발전했고, 주변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는 항일투쟁을 계획하는 데 이르렀다. '독립'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3년에 걸쳐서 계획을 만들었어요. 안동경찰서를 습격해서 무기를 얻고, 읍사무소 확성기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도 동참시키려고 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으는 데만 한참이 걸렸어요. 드디어 1945년 3월 10일, 일본 육군기념일에 맞춰 83명의 학생들이 궐기하기로 하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죠."
그러나 일경(日警)의 추적은 집요했다. 이미 핵심 지도부 학생들을 모두 구속한 일제는 이날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을 경찰서로 불러모은 뒤 주동자들을 끌어냈다. 장 씨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뒤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곡괭이 자루로 두들겨 맞고, 손톱 아래에 대나무 침을 박아넣는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한 그는 광복을 맞은 8월 15일,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이후에는 교육계에서 활동하며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데 앞장섰다. 고생 끝에 투옥 사실을 증명할 문서를 찾아 1999년 대통령 표창도 받았고, 지역 독립유공자들의 모임인 대구경북생존독립지사협의회에서도 활동했다.
"애국지사들이 모이면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나라의 뿌리'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건 주로 학생과 종교인들이었지만, 3·1 만세운동 때는 전 국민이 다 함께 일어서 폭정에 항거했기 때문이에요. 그 국민적 정신이 꽃 피운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입니다."

◆ "아픈 역사 기억해 교훈 얻길"
아흔을 넘긴 장 씨의 가장 큰 걱정은 잊혀가는 역사다. 함께 활동했던 애국지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때의 아픈 현실도 잊힐지 모른다는 염려에 속이 상해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국민들이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더 아프고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곳이 1919년 당시 대구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뛰어갔던 길입니다. 지금은 이곳에 태극기가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지만, 아마 당시 학생들은 장롱 깊은 곳에 숨겨두고 꺼내 봤을 겁니다. 이번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다시는 이런 치욕적인 역사를 쓰지 않도록 어제의 역사를 잘 살펴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또 "행사나 기념물이 아무리 많아도 국민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면서 "뼈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나라를 지키자는 결의를 가져야 진정 3·1 만세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라고 했다.
"몇 년 전까지 대구경북에만 20~30명 정도 남아있던 생존 애국지사들이 지금은 3명으로 줄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역사가 되겠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았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반면교사로 삼아주길 바랍니다."
태극기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는 장 씨의 옆으로는 한 무리의 동남아시아 관광객들이 연신 기념촬영을 했다. 3·1 만세운동길은 대구 독립운동사(史)의 성지이지만,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여행 목적으로라도 이런 곳을 자주 찾다 보면 자연스레 독립운동사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지켜보는 그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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