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시가 떠올랐다. 목월이 지은 '가정'의 한 구절인데, 간추려서 옮겨 적는다.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나는 초등학교 시절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물이 들어오지 않아서 좋았다. 실용적일 뿐 아니라 값이 비싸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어른들은 가죽신을 신고 다녔으나, 그 시절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때로는 명절을 앞두고 아버지가 새로운 신발을 사 오면 선반 위에 얹어놓고 명절날이 되기만 고대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고, 그에 걸맞게 운동화를 신었다. 평생에 처음 입어 보는 교복이며 운동화가 자랑스러웠다. 하루아침에 멋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교복에 때가 묻을까 해서 늘 조심하였고, 신발 또한 닳을까 봐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고무신으로 갈아 신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 어린 마음에는 귀하고 아까운 물건이었다.
아이들이나 서민들은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그러나 어른들이나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은 흰 고무신을 신었다. 그런가 하면 여인네는 예쁜 코고무신은 신었는데, 뽀얀 버선과 치마저고리를 갖추어 입고 길에 나서면 인물이 한층 돋보였다. 어쩌다 남의 집에 가서 댓돌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은 예쁜 코고무신을 보면 멋스러워 보였다.
우리나라에 고무공업이 시작된 것은 기미년 만세운동 무렵이었다. 고무제품으로는 신발류가 유일한 생산품이었고, 처음으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순종황제였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았고, 육이오 전쟁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운동화의 대중화와 구두의 생활화로 고무신의 선호도가 날로 떨어졌다.
'고무신을 신고 나가자 동무들이 신기한 신발을 구경하려고 나를 에워쌌다. 그리고 코가 널찍하고 물렁한 신발을 서로 신어 보자고 나를 졸라 대었다. 나는 껑충거리며 자랑하였다. 그러나 평생에 처음 신어 보는 자랑스러운 신발을 하루도 못 신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신발을 찾아 헤매는 나의 눈에 비친 달빛은 조금 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비록 한 켤레의 고무신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린 어린 소년이었다. 바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원망스럽고 허전하고 안타깝고 서러운 눈에 비치는 달빛은 밝고 푸른 것만이 아니었다.' 목월이 들려주는'달과 고무신' 가운데 한 대목이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댓글 많은 뉴스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지방 공항 사업 곳곳서 난관…다시 드리운 '탈원전' 그림자까지
김진태 발언 통제한 李대통령…국힘 "내편 얘기만 듣는 오만·독선"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
"차문 닫다 운전석 총기 격발 정황"... 해병대 사망 사고 원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