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후손이 밝힌 인동 장씨 문중 만세운동] 할아버지 흔적 찾아 1년동안 집안 독립운동 史 연구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있는 인동장씨 문중 재실 침류정. 이주형 기자.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있는 인동장씨 문중 재실 침류정. 이주형 기자.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논의 중인 인동 장씨 일가. 오른쪽에서 세번째 검은 정장 입은 이가 장성기 씨. 왼쪽부터 장병구, 장희우, 장지균, 장성기, 장효희, 장지국 씨. 이주형 기자.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논의 중인 인동 장씨 일가. 오른쪽에서 세번째 검은 정장 입은 이가 장성기 씨. 왼쪽부터 장병구, 장희우, 장지균, 장성기, 장효희, 장지국 씨. 이주형 기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에 대한 다양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상당수 독립투사들은 존재조차 잊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집안 문중 전체가 독립만세운동에 나섰지만 시간이 지나며 잊혀버린 경북 칠곡군 인동 장씨 문중의 사연을 쫓아가 봤다.

1919년 4월 9~10일, 이틀간 경북 칠곡군 석적읍(성곡·중동) 일원에서 일제에 항거해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긴 골짜기에 9개 마을이 자리 잡아 긴실·장곡이라고도 불린 이곳은 360여년간 인동 장씨 침류정 문중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이 흐르며 정작 장씨 집안의 후손들마저도 선조가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온 문중이 참가한 만세운동으로 집안 전체가 고초를 당한 아픔이 컸던 탓이다. 게다가 광복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 다부동전투로 장 씨 집성촌이 초토화되면서 이들의 만세운동도 함께 잊혔다.

장효희(86) 씨는 "당시 군인 시체가 골골마다 산처럼 쌓일 만큼 치열했다. 마을이 몇 차례 북한군 손아귀에 넘어가 쑥대밭이 됐다"며 "일제강점기 내내 집안 전체가 만세운동을 불렀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은 상태에 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렸다. 이후에는 다들 살기 바빠 만세운동을 기억할 여력조차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희우(73) 씨는 "만세운동 당시 5개월 징역살이를 했던 장영남(당시 47세) 어른이 내 할아버지의 형이니 종조부가 된다"며 "힘 좋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만세운동 당시 동네 뒷산으로 사람들을 모아 갔고, 후에 일본 경찰들이 출동하자 젊은이들은 마을 뒤편 대나무밭에 숨어 있으라 하고 본인 혼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장성기(63) 씨가 지난 3월 열린 제 100주년 3·1운동 기념식에서 조부 장준식 선생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장성기씨 제공.
장성기(63) 씨가 지난 3월 열린 제 100주년 3·1운동 기념식에서 조부 장준식 선생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장성기씨 제공.

◆집안 독립운동사 끈질기게 찾아 나선 후손

인동 장씨 집안의 독립만세운동 흔적은 장성기(63·대구 남구) 씨가 지난해 칠곡군에서 열린 '장곡 3·1만세운동 재현 행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장 씨는 장곡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30명이 아직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올 4월 대구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 이들은 대다수 인동 장씨 침류정 문중 사람들로 부자지간, 형제지간, 삼촌지간 등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장 씨는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만세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은 있었지만, 막상 조부에게 서훈 등 아무 흔적이 없는 것에 의구심이 생겨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팔문, 장용조 2심 판결문. 장성기씨 제공.
박팔문, 장용조 2심 판결문. 장성기씨 제공.

그는 지난해 3월 광복회에 조부의 독립운동을 문의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 시립도서관에서 과거 기록을 찾는데 몰두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사 사료집에 나온 장영조, 박팔문 2심 판결문이 단서가 됐다. 그는 장곡 3·1만세운동으로 태형 90대를 받은 박팔문 선생의 신문조서를 보다 조부인 장준식 선생이 주동자로 기재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 씨는 올 4월 초까지 1년 넘게 국가기록원, 독립운동사, 판결문, 수형인명부, 형사사건부 등 과거 기록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칠곡군 석적면 일대의 지역 동향을 기록한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에는 장곡지역 3.1 만세 운동 참가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장성기씨 제공.
칠곡군 석적면 일대의 지역 동향을 기록한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에는 장곡지역 3.1 만세 운동 참가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장성기씨 제공.

◆미서훈 상태 유공자, 재조명돼야

장 씨가 발견한 자료들에 따르면 장곡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한 72명 중 42명이 검거됐다. 대구지검과 대구지법은 1919년 4월 30일부터 5월 24일까지 37명에게 징역(8명), 태형(2명), 노역장 유치(1명), 불기소(26명) 처분을 내렸다.

장 씨는 이들의 형벌기록, 고등경찰요사, 공훈록 등을 참고로 독립운동 당시 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파악했다. 또 인동 장씨 족보를 토대로 현재 산소 위치, 후손 확인 등을 거쳐 30명의 가계도를 파악해 대다수가 인동 장씨 침류정 문중의 가까운 일가친척임을 확인했다. 장 씨의 노력 덕분에 조부 장준식 선생은 올 3월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다.

장 씨는 최근 서훈을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 대구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을 전면 개편해 유공자의 수형·옥고 기준을 완화하고 실형 유무와 상관없이 독립운동 활동내용이 분명하면 포상을 고려하고 있다.

장 씨는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 대다수가 인동 장씨였는데, 이 중 30명만 확인이 가능했다. 나머지 7명의 경우는 형사상 기록과 족보상 이름·나이가 조금씩 달라 포함시키지 못했다"면서 "만세운동으로 형사처벌을 받았음에도 잊혔던 박팔문(태형 90대)과 김득룡(징역 5개월)은 성씨가 다르지만 한동네 살았던 분들도 함께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대구보훈청은 "유공자 포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지난달까지 57건의 포상신청을 접수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26건의 2배에 달한다"며 "장 씨가 신청한 30명에 대해서도 독립운동 공적과 행적 검증 후 포상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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