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은아의 북돋움] 사슴이 아닌 노루, 밤비에게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직업 특성상 장거리 운전을 자주 한다. 그런데 공간지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읽는 속도가 느리다. 내려야 할 IC를 지나치고 길을 잘못 접어들어 되돌아 나오는 것은 예사이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되는 농로, 차가 잘 다니지 않는 시골길과 어디인지 모를 도로를 달릴 때는 대한민국 땅이 무척 넓게 느껴진다. 세계지도에서는 손톱 크기밖에 안 되지만 직접 운전해서 다녀보면 멀고 길고 깊다.

도시와 어촌, 농촌, 산촌의 자연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계절을 알리는데 이맘때의 초록은 보드라워서 좋다. 그런데 한참 풍경에 취해 가다가도 잘리고 꺾인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들, 뼈를 드러내듯 처참하게 파헤쳐진 산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기분 좋게 흘러가던 감상은 그대로 멈춰 버린다. 골프장, 아파트, 도로 건설에 희생당하는 자연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서 혼잣말을 한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물론 고속도로 덕분에 장거리 운전이 편해졌고 오가는 시간도 많이 단축됐다.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사는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들은 필요한 만큼만 먹이를 구하고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에만 싸우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변형을 이루며 자연을 침범하고 파괴한다. 너무도 당연한 듯이.

코로나19의 역설, 인간이 멈추니 지구가 살아난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숲 속의 노루 밤비'(파랑새)의 후반 어느 페이지이다. 이 책은 1923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펠릭스 잘텐(1869~1945)이 발표한 동물소설로 인간이 저지르는 자연 파괴 행위를 다루고 있다. 100년 전에도 자연 파괴가 심각했지만 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함을 반성하고자 했던 잘텐의 작품은 시대를 앞선 생태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사슴이 아닌 노루인가? '밤비'(Bambi)를 월트 디즈니가 만들어낸 만화영화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밤비가 사슴이라고 말한다. 미국에는 노루가 없다. 그래서 잘텐의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 노루인 밤비를 '흰꼬리사슴'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디즈니가 만화영화를 제작할 때도 영어로 번역된 책을 바탕으로 했기에 밤비는 노루가 아닌 사슴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만화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이 '밤비'의 원작자를 월트 디즈니로 착각했다. 감동과 성찰로 가득한 원작소설이 만화영화에 밀려 외면당한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영진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밤비'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변형된 매체로만 작품을 만나서는 안 되며 원작을 읽음으로써 더 정확히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엄마를 잃은 밤비는 숲속에서 혼자 그리고 더불어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총과 덫을 가진 사람들을 피해 수많은 고비를 넘는 동안 한 가지 물음에 골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다.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런 밤비에게 늙은 수노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지 않아. 세상의 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사람' 덕분도 아니고! '사람'은 우리 위에 있지 않다. '사람'은 우리와 나란히 있을 뿐이야. 우리와 마찬가지이지. '사람'도 우리처럼 두려움과 배고픔과 고통을 겪는단다. 우리처럼 공격을 당하고 속수무책으로 땅에 쓰러지지."

오래전, 처음 읽으면서 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도 같은 문장에 줄 긋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금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습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인간이 멈추니 지구가 살아난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자연이 정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인간의 활동이 비정상적으로 멈춘 결과이기에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인간도 움직이고 자연도 살고, 모든 생명체의 터전인 지구도 사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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