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와 6·25전쟁 중 어느 쪽의 상처와 피해가 더 크고 깊을까. 양이나 질로 가늠하기 어렵다.
전쟁 중이라도 일본이 개입하면 총구를 그들에게로 돌리겠다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가 있고,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일본과 북한, 어느 쪽이 진정한 '적'일까. 이념 지향, 시대 상황, 정파 등에 따라 답이 갈린다. 우문(愚問)이라 할지 모른다.
북한 같은 공산 치하가 좋은가, 일제 식민지 지배가 좋은가라는 유아적 문답으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념이나 현실에서 이 두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친일 청산은 시대의 과제이며, 북한은 안보의 '주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친일과 용공(친북)이 우리의 사고와 심리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친일과 용공이 반드시 한국에 굴레와 손실로만 작동했을까.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한국은 자생적 근대화를 했을 것이고, 6·25로 나라가 초토화되지 않았으면 더 순조롭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성립한다.
반면에 일본과 북한의 존재가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국에 포위된 홍콩,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된 도시국가 싱가포르, 중국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타이완, 북한의 위협과 일본의 신식민주의를 마주한 한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위기의식이 가장 높은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는 위기의 일상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용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과 북한을 대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다. 곡절은 많으나 일본과는 수교를 해 가까이 지내왔으나, 북한과는 아직 전쟁 상태를 끝내지 못했다.
일본은 심리적인 '적'으로 남고, 북한은 현실적 '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일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어땠을까. 경제발전은 더디고, 그 때문에 민주주의도 늦어졌을지 모른다.
일본의 도움이 아니라 그들을 가까이 두고 활용한 한국의 지혜가 일본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만든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북한이 가상의 '적'이든 동족이든 멀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까이하지 않으면 원수를 갚지도 못한다.
외나무다리에서라도 만나야 원수를 갚을 기회가 생긴다. 같은 민족이면 더더욱 가까이해야 하지 않을까. 1961년 8월 동독은 예고 없이 베를린시를 동서로 가르는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약 7만 명의 시민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며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후에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받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야간 열차 침대에서 잠결에 보고를 받고 경악했으나, 동독의 조처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그걸 바꾸는 방법은 전쟁밖에 없으나 그걸 위해 아무도 전쟁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브란트는 참모들에게 "전부 아니면 전무를 버리고, 접촉을 통한 변화를 찾자"(Wandel durch Annäherung)고 했다. 2년간의 지난한 저자세의 협상 끝에 통행증 협정으로 베를린의 숨통을 뚫었다.
지난주 북한과 관련하여 상반된 흐름의 두 사건이 발생했다. 어업지도선 공무원이 실종된 후 북한 수역에서 피살되었다.
23일 오전 1시부터 청와대에서는 관계장관회의가 열렸고, 같은 시간대에 15일 녹화된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공개되었다. 국제사회에 남북한의 종전선언을 호소한 것이다.
피살 사건은 지난 6월의 개성공단 연락사무소 폭파의 재연이다. 종전선언 제안은 지난 8일과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고받은 친서의 연장이다.
종전선언 제안과 피살 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해석과 대처가 혼돈스러운 와중에 피살 사건 공개 하루 만에 김정은 위원장이 사과를 표명했다. 매우 이례적 조치이다.
영화 대부에서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에'를 가족(family)의 영속적 생존 원리로 하고 있다. 북한을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김정은의 진정성을 따지고, 재발 방지, 책임 추궁 등도 할 수 있다. 대화로 이어가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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