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과 녹두, 검은콩 등 한 알 한 알 정성 담은 곡식들이 캔버스 위에 흩뿌려져 있다. 하늘의 별로, 꿈틀거리는 용암으로, 드넓은 대지로 발현한 알곡들은 마치 나약함이 뭉쳐 큰 힘을 내는 유기적인 생물처럼 보인다.
여류작가인 정정엽 작가는 유년시절부터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삶과 미술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고민과 함께, 탐미주의적 예술에 반기를 들고 미술의 사회적 가치를 찾고자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개인, 여성, 예술가인 자신의 정체성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관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응답하는 예술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하찮게 치부되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반복적 노동이라는 씨앗을 캔버스에 심는다. 곡식으로 밥을 짓고 살림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작가는 매일 곡식을 쓰다듬듯 붓질한다. 현상적 이미지보다 이면에 숨어있는 시대를 향한 저항에서 발아한 회화적 실천인 셈이다.
작가는 "제멋대로 구르다 물구나무를 선 팥이 자유로움을 준다. 살림의 근육으로 고립된 시간을 축적하고 또 흘려보낸다. 팥, 콩처럼 날마다 구르다보면 문득 저 멀리 알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잠재된 물질의 속살을 더 깊숙하고 의미있게 해석해 새롭게 풀어내는 그의 시도에서 본질을 꿰뚫는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정정엽 개인전 '물구나무 팥'은 16일(수)부터 4월 24일(일)까지 봉산문화회관 2층 4전시실에서 열린다. 봉산문화회관의 기획전시 '기억공작소'의 올해 첫번째 이야기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053)66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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