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대한축구협회의 벌거벗은 임금님, 정몽규

채정민 체육부 차장
채정민 체육부 차장

옛날 어느 나라에 무능하고 욕심 많은 임금이 있었다. 하루는 거짓말쟁이 재봉사가 임금을 찾아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옷이란 말을 덧붙였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재단사의 작업 과정을 살피라고 했다. 신하들이 아무리 봐도 재단사는 허공에 대고 옷을 만드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어리석다는 게 탄로 날까 두려워 멋진 옷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거짓 보고했다.

물론 완성됐다는 옷은 임금 눈에도 안 보였다. 그러나 임금 역시 어리석음을 숨기려고 옷이 보이는 척했다. 그러고는 그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했다. 신하들도, 시민들도 침묵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치자 다들 속았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의 줄거리다. 문학은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를 요즘 현실에 비춰 봐도 낯설지 않다. 굳이 정치판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대한축구협회와 그곳의 수장 정몽규 회장이 보여 준 작태는 이 동화 속 세상보다 나을 게 없다.

최근 한국 축구는 참사를 겪었다. 역대 최강이라던 대표팀으로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에 출전, 64년 만의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감독의 방관' 속에 4강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요르단에 0대 2로 완패했다.

손흥민, 김민재, 황희찬, 이강인이 대표팀에 승선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위르겐 클린스만 대표팀 감독은 이들을 하나로 만들지도,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지도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대회 전부터 불성실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여기에 무능력하다는 비판이 더해졌다. 그를 선임하기 전부터 나왔던 얘기라는 게 더 문제다.

결국 화살은 대한축구협회와 정몽규 회장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전임자였던 파울루 벤투 감독(현 UAE 감독)의 성과에 대해선 긍정론과 부정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벤투 선임 과정이 일정한 원칙과 시스템에 의해 진행됐다는 점은 부정하는 이가 드물다. 문제는 벤투 선임 과정에 참여했던 이들이 물러난 뒤 정 회장에게 힘이 집중됐고, 그 결과는 다들 지켜본 것처럼 처참했다는 점이다.

클린스만의 임명 과정은 불투명했다. 정 회장이 변명했지만 그 말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이 없었다. 계약 기간 도중 경질한 만큼 클린스만 측에 물어 줘야 할 위약금도 있다. 수장의 헛발질 탓에 대한축구협회가 수십억원의 손실을 봐야 할 판이다. 한데 정 회장은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말만 할 뿐,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

정 회장은 이미 축구 팬들에게서 신망을 잃은 지 오래다. 지난해엔 A매치가 열리기 1시간 전 승부조작범을 포함해 징계를 받은 이들을 기습적으로 사면했다. 여론이 들끓자 이 조치를 무효화하고 임원진은 물러났으나 정 회장은 제자리를 지켰다. 최종 결정권자인 자신은 칼을 피했다.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기로 연명했다.

정 회장은 '공정'이란 가치를 대놓고 부정하고, 모욕했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다. 한 술 더 떠 감독을 잘못 뽑아 국제대회에서 망신을 자초했다. 게다가 이젠 국제축구연맹(FIFA)과 AFC 임원 자리에 도전한단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벌거벗은 임금처럼 주변에 진실을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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